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에서 일어난 자파티스타 봉기는 미국이 멕시코에 강제화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었습니다.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이 사태는 다만 정치경제적 의미로 그친 것이 아니라, 멕시코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게도 의식의 각성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 봉기의 지도자 마르코스의 존재는 자파티스타 운동에 신비감을 더해주었습니다.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마스크를 쓰고, 인터넷에 자신들의 주장을 띄우고 지속적인 세계적 관심을 모아나가는 그의 투쟁방식은 자신들에 대한 지지 세력을 확산하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었습니다. 그가 쓴 편지를 모아 출간한 책의 이름은 “부드러운 분노의 그림자(Shadows of Tender Fury)”로서, 억압에 대한 분노를 결코 거칠게 폭발시키지 않는 차원 높은 혁명의 정신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쓴 글귀에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정의롭고 진실되다. 이는 그 어떤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대응이 결코 아니다. 이는 모든 멕시코 인민들과 특정지역의 토착민들이 꿈꾸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위한 일이다. 우리는 정의를 원하며 우리는 끝까지 이 혁명을 진전시켜나갈 것이다. 희망은 단지 현실에서 찾아지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슴에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자파티스타 혁명의 경험을 또한 모아놓은 책은 그 제목이 “하하하, 제 1세계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1세계라고 하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이 자신들만이 세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 지침에 따라야 세상은 풍요하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자파티스타는 하하하 하고 웃으며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입니다.
1994년이라고 하면, 냉전 이후 국제상황의 변화를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말로 표현했던 시기였습니다. 즉, 국가와 국가의 경계선을 없애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모두의 부를 약속해줄 것이라는 식의 논리가 냉전논리를 대체하고 있었던 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초가 만들어졌던 전환기적 과정이었습니다.
자파티스타 혁명은 다만 자본이 주도하는 세상에 대한 반격과 대안의 모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운동을 펼쳐나가는 주체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 주체는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농민들, 그 가운데서도 인종적으로 멸시의 대상이었던 원주민 인디오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식하고 무지하며 가진 것 없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데 그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는가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아온 이들이 도리어 상대를 향해 하하하 하고 웃어제낀다면 그건 통쾌한 역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재력이나 권력도 없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비웃음을 보기 좋게 뒤집어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혁명의 새로운 시작일 것입니다.
이 일에 나서는 이들에게 마르코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행진하라. 강자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논리만 주장할 수 없도록 하라.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독과 우리를 처참하게 만드는 가난뿐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은 또한 거짓과 위선이니 이 모두가 다 더 이상은 목소리를 높일 수 없도록 하자. 진리가 말하도록 하라. 정의와 평화는 거짓을 용납하는 침묵 속에서 불가능하다. 평화는 자유에서 태어나고, 정의 위에서 자라나며 그로써 모든 이에게 품격 높은 민주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에 대한 부르짖음을 중단하지 않는 자파티스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식민주의 논리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격하고 나선 이들의 투쟁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의 관심을 모아나갈 기세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의 모순을 매우 일찍 간파하고 이를 타파해나가는 노력을 기울여 온 이들의 목소리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절차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 사회의 가장 낮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의 삶에 정의를 실현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내용을 완성시켜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이들 자파티스타의 육성이 주는 교훈은 여전히 작지 않을 것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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