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협력 논의가 빠진 6.20 한일정상회담**
회담 발표 4시간 전까지도 그 개최 여부가 불분명했던 한일정상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6월 20일 청와대 상춘제에서 열렸다. 지난해부터 1년에 두 차례씩 열기로 정례화된 한일간 셔틀 정상회담이 겨우 3회째에서 중단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국내외에서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 올해 2월부터 독도 및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일본 측에 의해 크게 불거진 데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3월 23일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대일 초강경 노선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태도 변화는 목격되지 않았다. 개선노력은커녕,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수상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지하라는 우리와 중국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고, 야치 쇼타로 외무성 사무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잇달아 망언을 퍼붓는 등 일본 측은 오히려 우리 정부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청와대 내부에서 정상회담 무용론이 나오고,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마지막 순간까지 "(한일정상회담을 해야)할지 말지, 하더라도 어떤 의제를 논할지 고민이다"라는 표현을 하며 회의에 빠져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내부 갈등을 극복하고 한일정상회담을 당초 예정대로 열어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지 않도록 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독도문제나 과거사 문제는 단호하게 풀어나갈 과제임에 분명하나, 그렇다고 그로 인해 한일 외교관계 전반을 해쳐서는 아니 될 것이기에 그러하다. 싫든 좋든 일본은 우리의 현재 및 미래 국익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이다. 한일관계의 발전 양상은 우리의 경제 성장 속도 및 정도에 직결되며, 국제사회에서의 우리의 위상과 지위, 그리고 특히 우리의 북한 및 주변 강대국들과의 외교안보관계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일본과의 긴밀한 논의와 협조가 필요한 문제는 무수하며 그 종류와 성격도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총 2시간 중 1시간 50분이 역사문제에 대한 공방으로 지나갔다고 한다. 양국간에 가장 핵심적인 현안 중 하나인 한일 FTA를 포함한 경제협력 문제가 증발된 것이다. 고작해야 고이즈미 총리가 김포-하네다 항공편을 8월부터 현재 하루 4편에서 8편으로 증편하기로 했다고 밝힌 부분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사안은 정상회담 이전부터 이미 관련부처 선에서 결정된 것일뿐더러 어렵게 만난 양국 정상들이 다룰만한 것도 아닌 소위 ‘자잘한’ 이슈에 불과하다.
후문에 의하면, 역사문제에 대한 공방만이 계속되자 고이즈미 수상이 다른 의제로 넘어가려는 듯 한일 FTA 협상이 조속히 재개돼야 한다는 얘기를 꺼냈지만 노 대통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아쉬운 측면이 있다. 한일 FTA 체결 문제는 1998년 그 논의가 개시된 지 무려 5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야 2003년 10월 겨우 정부간 협상에 들어간 막중한 외교 현안이다. 그 동안 민간연구, 재계 협의, 산·관·학 공동연구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도 별 진전이 없자 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직접 만나 정부간 공식협상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들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수상이다. 그 후 우리 정부는 한일 FTA가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중차대한 외교 이슈라고 규정하여 2005년 말까지 체결에 합의한다는 목표를 세워 의욕적으로 협상에 임해왔다. 그러나 한일 FTA 협상은 2004년 11월의 6차 회담 이후 현재까지 장장 8개월째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일본이 제시한 농수산물 분야의 개방 폭이 크게 미흡하여 ‘잠정 제안서’를 교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교착의 주 요인이 된 농수산물 개방 문제 외에도 비관세장벽의 해소나 FTA와 연계된 일본의 대한투자확대 방안 등 우리가 일본 측에 시정과 양보를 요구할 경제협력 문제는 산적해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그것도 우리가 거부하였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투 트랙(Two Track) 노선의 포기?**
고이즈미 수상은 이번 정상회담 석상에서 “나라와 나라 간에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다”며 “이런 나라 간에는 전체를 보면서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고, 교류협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장기적 해결 자세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그것만으로는 미래의 진정한 평화가 보장된다고 하기 어렵다”고 말한 뒤, “미래의 평화를 위한 외교적·정치적 틀을 제도화해야 하고, 다음에 양국 사이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고 화해를 이룰 수 있는 조치를 해야”하며, “그 다음에 경제·사회·문화 교류와 협력을 진행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한다. 두 지도자가 갖고 있는 양국 간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서로 판이하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이즈미 수상은 교류협력의 확대, 양국간 신뢰구축, 과거사 등의 근본 문제 해소라는 순서에 의한 기능주의적이며 장기효과 지향적인 해법을 내놓은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평화 조건의 국제제도화, 양국간 신뢰구축, 교류와 협력의 증대라는 역순을 제시함으로써 제도주의적이며 단기효과 의존적인 해법을 강조한 것이다.
고이즈미 수상의 기능주의적 접근법은 사실‘국민에게 드리는 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가 견지해오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일 간의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 교류를 과거사나 독도문제 등과 분리 추진한다는 소위 ‘투 트랙(Two Track)' 노선이 우리의 기본 입장이었다. 일본 언론들이 꼬집지 않았더라도, 노 대통령이 작년 말 일본 방문시 자신의 임기 중에는 과거사 문제를 공식적으로 쟁점화하지 않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을 위하여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 증진에 힘쓰겠다고 언급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투 트랙 노선을 취하겠다는 입장은 참여정부의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인 동북아시대구상의 구현전략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EU식 (신)기능주의 접근을 취함으로써 한일경제협력을 강화해나가는 것은 종국에 평화와 공동번영의 동북아시대 건설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국제정치경제적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에 대한 투 트랙 노선의 견지는 한일관계보다 상위 국정 목표인 동북아시대구상의 구현을 위해서도 마땅한 정책태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담에서 노대통령은 경제협력 등 양국간 교류 문제는 과거사 문제 등이 해결된 이후에나 발전 가능한 일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즉 투 트랙 노선의 포기를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고이즈미 수상이 제안한 한일 FTA 협상의 재개 논의를 이러한 맥락에서 무시한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대하여 이제 정말 새로운 노선을 추구하겠다는 것인가?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일본과는) 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를 뽑도록 하겠다”고 표현한 대로 정말 일본과의 외교전쟁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인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식의 기우에 불과하길 바랄 뿐이다.
***3. 중장기과제와 중단기과제의 분리 및 조화가 필요**
세계화시대를 살아가겠다면, 그리고 특히 동북아시대를 구현하겠다면, 일본과의 경제협력은 어느 경우이든 지속돼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야 한다. 한국경제의 일본 의존성은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과거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에, 미국은 유럽에, 일본은 미국에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현재도 캐나다는 미국에, 유럽의 강소국들은 역내 강대국들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국가들간의 상호의존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은 오히려 적극 활용해야 할 일이다. 일본과의 경제협력을 통하여 우리의 수출을 늘리고, 산업경쟁력을 강화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기술과 자본력을 끊임없이 제고시켜 가야 한다. 현재 우리 정부가 구상하거나 추진하고 있는 중장기 외교목표도 일본과의 협력관계 유지 없이 성사 가능한 것은 거의 없다. 동북아시대 및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물론 남북한 간의 민족공동체 형성도 일본의 협조가 전제될 때 비로소 순조롭게 추진해갈 수 있는 외교과제들에 해당한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의 지역주의 발전이 우리의 미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일본과의 협조체제 구축은 최우선시 돼야 할 필수 작업이다. 한일 양국은 이 지역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소위 ‘가치기반 공동체’ 건설의 두 주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통합과정에서 협력적 주도 역할을 수행했음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실제로 현재의 EU가 탄생되기까지 가장 중요하고 다이내믹한 일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인 1982년부터 1992년 사이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콜 독일 수상이 만난 횟수는 무려 115회라고 한다. 1년에 10회 이상을 만났다는 것이다. 독불 정상들 간의 이러한 지속적 만남이 1992년의 EU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그 수많은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어찌 양국 사이에 얼굴 붉힐 일이 없었겠는가. 더구나 그 둘은 수백 년간을 견원지간으로 지냈던 사이가 아니던가.
길게 보고 차차 풀어 가야 할 문제에 매달려 당장 풀어야할 문제마저도 놓치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과거사 문제는 이번 회담에서 성과가 없을 게 뻔한 의제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그러한 문제에 대한 공방으로 그 소중한 정상회담 시간의 대부분을 소모할 필요가 있었는가. 오히려 그 문제는 나중에 풀릴 성질의 것으로 인정하고, 우리가 당장 얻을 수 있는 실리를 추구해야 했던 게 아닐까?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중장기과제와 중단기과제의 엄격한 분리 추진과 그 둘 사이의 합리적 조화를 도모하는 안정적 정책 기조를 재건해야 한다. 큰 그림을 그리되 구석구석의 세부 내용이 꽉 찬 그림이어야 하며, 긴 여정의 로드 맵을 작성하되 주요 단계별 연계가 분명하고 그 행로가 뚜렷한 지도여야 한다. 그리하여 세부별ㆍ단계별 추진 전략을 수행함에 있어 어떠한 돌출 사건에도 흔들림 없이 그 지속성과 일관성이 담보되어있어야 한다. 각 단계에서 추진해야 할 정책과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것들이 쌓여 어느 새 최종 목적지에 도착될 수 있는 그러한 정책 추진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발표된 며칠 후 있었던 기자들과의 산행 자리에서 일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말 외교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도냐는 질문에 대해 “동북아 평화구도는 국민들 의식 속에 자리 잡아야지 정치인 몇 사람이 선언한다고 정착될 문제가 아니다”며, “따라서 일본 국민이 문제의 본질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토록 함으로써 자각이 생기도록 해야”한다고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과거사 왜곡 등의 근본적 성격의 문제 해결은 일본 국민들의 의식이 변화할 때까지 노력하고 기다려야할 중장기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노 대통령의 그러한 인식이 우리의 실제 대일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길 바라마지않는다. 즉 일본국가의 변화를 가져올 일본국민들의 의식변화를 위해 노력하되 그것은 중장기적 과제로 꾸준히 추진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당장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우리의 국가역량을 경제협력 강화 등과 같은 중단기적 과제에 치중하는 체계적 정책 기조가 확립돼야 한다는 것이다.
중단기적 정책과제의 업적들이 축적돼감으로써 그리고 그 효과들이 확산돼감으로써 종국에 장기과제의 완수를 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호조건이 형성될 수 있음은 이론과 경험이 공히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정부는 이제 일본에 대한 중장기과제와 중단기과제를 확실하게 분리 추진해야할 것이며, 전자의 수행과정상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후자의 추진마저 중단되거나 변형 혹은 연기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과거사 문제는 어차피 긴 호흡으로 풀어야 할 장기과제이다. 국수주의에 가까운 보수우익 정치가들이 이끌어 가고 있는 일본의 현 정치구도와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여전히 상당수에 달한다는 작금의 일본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비추어 볼 때 일본에게 과거사나 영토 문제 등에서의 획기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것은 결국 일본 국민들의 의식이 충분히 성숙될 때 해결 가능한 문제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기능주의적 접근법을 고수할 일이다.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예컨대 한일경제통합이 심화되고 양국 시민들 사이에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자리 잡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근본 문제들의 해결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자책과 반성 태도가 일본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이유를 민족성이나 정치문화 혹은 국제정치 조건의 차이에서만 찾아서는 곤란하다. 독일의 반성이 현재와 같이 전 사회적, 전 국가적 수준의 것으로 성숙 발전되기까지에는 프랑스를 포함한 과거 피해국들과의 경제·사회·문화적 교류와 협력의 증대, 그리고 지역통합이라는 결과가 기여한 바 크다. 독일의 반성 정도는 상당 부분 유럽의 통합 수준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폴란드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했던 일은 과거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진실한 반성 자세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인정받고 있는데, 우리는 그 장면이 1945년의 2차대전 종전 직후가 아니라 그 후 4반세기가 흐른 후인 1970년에야 연출된 것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의 출범 이후 거의 20년, 그리고 1967년 유럽공동체(EC)가 발족된 이후 수년 후에야 가능했던 상황이었음에 유의하자는 것이다.
주지하듯 현재까지도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해를 거듭할수록 그 내용이 구체화되고 알차지고 있다. 1970년 이전에는 연구와 교육 수준에 머물렀던 과거사에 대한 반성 자세가 그 이후에는 보상과 지원 등과 같은 구체적 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는 정치이론과 국가철학으로까지 발전해가고 있다. 가해국과 피해국 국민들 간에 각 영역에서의 교류가 늘어가고, 사이가 가까워지며,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폭과 깊이가 늘어가 종국에는 하나의 공동체 시민들로서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게 된다고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생기고 따라서 그 때 진정한 사과가 우러나온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일본 문제에 대하여 기능주의적 해법이 채택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가길 바라는 까닭이다.
***4. 다차원적 접근에 의한 대일 경제협력 외교**
과거사 등의 근본 문제는 미래 해결에 맡기고 현재는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교류의 확대 등 산적한 중단기 과제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경제협력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한일 FTA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 이것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현 및 동아시아공동체 건설 등 우리의 중장기 대외정책 목표 달성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작업이다. 한국과 일본 경제가 자유무역지대로 통합된다면 동북아시대나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의 실현은 보다 용이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일 FTA 하나만 보더라도 그 성공적 추진은 우리 정부의 내·외교 역량 모두를 투입해야 할 정도로 매우 어렵고 복잡한 과제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과 일본 양국 간만의 대외경제 문제가 아니라, 북한·미국·러시아·중국·ASEAN 국가 등 주변 국가 모두에게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국제 정치경제 문제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한일 FTA의 체결은 기존 한미일 3각 공조체제를 보다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 경우 여타 변수의 움직임에 따라 한일 FTA는 다시 중국을 고립시킬 수도 혹은 협력체제 안으로 유도할 수도 있는 제3의 외부효과를 파생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즉 중국의 소외감과 그에 따른 국제정치적 부작용이 우려된다면 한일 FTA 체결 준비에는 중국 변수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대응 방안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북아시대는 오히려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공동체 건설과 관련되어서도 한일 FTA 체결 전후의 역내 경제외교를 어떻게 전개해갈 것인지에 대한 복안이 준비돼야 한다. 한중 및 한-ASEAN FTA의 추진을 한일 FTA의 체결과 시기적·내용적으로 어떻게 구분하고 연계시켜야 종국의 목표인 동아시아FTA(EAFTA)의 완성에 도달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치밀한 전략이 수립돼야 한다. 만일 일본이 국내정치적 제약을 이유로 지금과 같은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한-ASEAN FTA의 추진과 더불어 한중 FTA의 선행 체결도 대안으로 고려돼야 한다. ASEAN+2(한중) 형식으로 일본을 압박할 필요도 상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일 FTA체결은 또한 국내 정치경제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FTA 체결로 인한 피해집단의 정치사회적 저항과 반발이 상당해진다면 이는 매우 어려운 국내정치 현안으로 대두될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경우 한일 FTA 체결은 사회통합을 해쳐 오히려 국익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FTA 정책이 ‘사회통합형’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보상책 마련과 그것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정치경제 구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우선 FTA로 인한 산업별, 기업별, 계층별 손익계산서가 정확히 나오고, 그에 기초하여 적절하고 효과적인 보상과 구조조정 방안이 수립 집행되어야 한다. 이 같은 국내 노력뿐 아니라 상대국인 일본을 대상으로 하는 대외적 노력도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일본의 대한 투자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킬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것은 양국 간의 무역자유화 조치가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이전에 보다 빠른 속도와 보다 큰 규모로 진행되도록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일본의 부품, 소재, 자본재 분야에서의 산업기술 이전과 직접투자를 활성화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통하여 일본에 대한 우리의 산업 경쟁력 열세를 좁혀갈 수 있고,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 구조의 심화라는 우려를 완화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우리 산업과 기업들에 팽배한 한일 FTA 반대 정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본 바와 같이, FTA 체결을 포함한 대일 경제협력 문제는 국제 및 국내, 경제 및 정치, 대 일본 및 대 주변국 (내)외교라는 다차원적 접근에 의해 풀어가야 할 매우 복잡한 정책 과제이다. 특히 이 과제가 동북아 및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 작업과 맞물려 추진되어야할 중층적 성격의 복합 과제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만의 사정이나 감정에 의해 즉흥적으로 동 과제의 추진 일정 및 방향을 연기하거나 급전시키는 일 등이 생겨서는 아니 된다. 우리와 상대국인 일본은 물론 주요 관련국들인 북한, 중국, 러시아, 미국, 그리고 ASEAN 국가들과 관련된 제반 변수들을 상시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여 그에 기반한 치밀한 전략 수립과 효율적 수행 능력을 발휘해야 비로소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과거사 왜곡 등과 같이 장기적으로 풀어가야 할 근본적 문제로 인해 고도의 정밀성과 시의성을 요구하는 한일 FTA의 체결과 같은 중단기적 경제협력 과제의 추진에 차질을 빚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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