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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아르헨 해군이 본 독도와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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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아르헨 해군이 본 독도와 대마도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67>

***'아르헨 해군, 대마도 주위를 대한해협으로 표기'**

동해의 외딴 돌섬인 독도를 놓고 한ㆍ일 양국이 해묵은 영유권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어났던 러일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의 한 고위급 장교가 쓰시마(대마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동해 앞바다 해전을 참관, 당시의 해전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르헨티나 해군에 대한제국(Imperio de Corea)과 울릉도, 그리고 독도의 존재를 알린 전사기록이 발견되어 화제다.

'러일전쟁의 군사작전과 해전'으로 명명된 이 기록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대마도 해전내용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대마도 주위를 대한해협(Estrecho de Corea)으로 분명하게 표시를 해놓아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00년대 초 아르헨티나와 국교를 맺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앞두고 아르헨티나에 해군함정과 전술지원을 요청, 아르헨티나로부터 6척의 전함과 상당수의 해군병력을 지원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은 도멕 가르시아(Domecq Garcia)제독을 6척의 군함과 함께 동해로 파견했다. 그러나 아르헨 해군은 전투에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고 군함관리와 일본 도고 연합함대의 자문역할만을 수행했다.

러일전쟁의 현장에 제3자의 입장으로 참전한 가르시아 제독은 1905년까지 2년동안 치열했던 해전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5백12쪽에 달하는 이 전쟁 기록 속에는 아시아지역의 전략적인 요충지가 대한해협(쓰시마 섬 주변)에서 울릉도 앞바다로 이어지는 동해임을 지적하고 당시 해전상황을 지도로 표기하여 극동아시아에서 동해의 위치적인 중요함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이 기록은 책으로 인쇄한 것이 아닌 가르시아 제독이 직접 타이프로 치거나 친필로 그린 그림을 곁들인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책이어서 러일전쟁을 제3자가 객관적으로 서술한 귀중한 자료로 현지에서는 평가 받고 있다.

가르시아 제독이 기술한 러일 전쟁 상황도에 따르면 대한해협의 대마도전쟁이 가장 치열했으며 울릉도 앞바다와 지금의 포항부근에는 러시아 로제스트 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 함대가 진을 쳤고, 독도는 일본해군이 전쟁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히 이 기록에는 울릉도는'마쓰시마'라는 일본식표기를 해놓았으나 독도는 '바위섬들'로 표기한 것이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가 막강한 발틱 함대를 동원하고도 일본의 도고 함대에 패한 원인에 대해 가르시아 제독은 "당시 발틱 함대는 유럽대륙을 거처 남아프리카 희망봉, 인도양, 그리고 동남아를 거처 남해를 지나는 동안 반죽음상태가 된 해군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는 무리한 작전의 실책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일본의 해군력을 과소평가한 무지한 전략이 패전을 자초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부터 2척의 군함을 구입하면서 4척의 보조함과 해군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일본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인 아르헨티나는 러일전쟁 당시 6척의 군함과 해군을 동해로 파병, 일본 해군의 전력을 급상승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르헨티나가 일본에 군함을 판매하게 된 건 당시 아르헨의 해군력 증강에 불만을 품은 칠레와 브라질 등 남미국가들이 해군력을 축소하라는 강한 항의에 따른 것이었다. 아르헨 정부가 남미화합 차원에서 다른 남미국가들과 해군 전함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2척의 전함을 급히 일본에 매각한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칠레와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일본을 간접적으로 도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셈이다.

가르시아 제독이 기록한 러일전쟁사에 따르면 일본은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독도를 하나의 이름없는 돌섬으로 여겼으며 자신들의 영토개념이나 이름조차 없는 섬으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려면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와 진해항까지 일본영토라고 해야 할 판이다. 왜냐하면 당시 진해항 혹은 부산항은 도고 연합함대의 전진기지역할을 했으며 울릉도는 일본이 '마쓰시마' 섬으로 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당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로 편입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1906년까지 일본에 파견돼있다 아르헨티나로 귀국한 가르시아 제독의 동해 해전역사에는 일본이 독도를 그냥 이름없는 돌섬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가르시아 제독은 일본으로부터 국빈에 가까운 VIP대접을 받았고 동해의 격전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며 천황을 만나는 등 수시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작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가르시아 제독의 독도표시는 일본의 정통한 정보에 의해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더욱이 가르시아 제독은 이 기록에서 독도주변에 진을 친 일본 해군함정의 수효를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시를 해놓아 독도현장 역시 직접 방문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1906년까지 일본은 공식적으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지 않았고 섬 이름 또한 공식적으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가르시아 제독의 러일전쟁 해전상황도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오히려 대한해협에 위치한 대마도영유권을 주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가 대마도주변의 대한해협으로 표시해 놓은 가르시아 제독의 해전상황도를 우리 정부가 독도분쟁의 대비책으로 활용, 대마도가 우리영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여 독도분쟁에 맞불을 놓았으면 싶다.

***'대마도는 한국영토?'**

대마도가 한국영토였을 가능성은 '한국인들'이라는 제하의 1858년 4월2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도 보도가 되어있다.

영국의 시사주간뉴스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는 영국의 상업선단이 일본과 대마도, 부산을 방문했던 것을 기초로 하여 동양기행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그 당시 일본과 부산을 여행한 동양의 전문 탐험가 캠퍼페르(KAEMPFER: 네델란드 출신 탐험가, 1651-1716)가 신문사 기자일행과 함께 일본까지 여행, 한국과 일본의 모습을 영국에 알린 것이다.

이들 일행은 일본과 대마도를 거처 부산항을 방문, 부산항의 모습과 그곳 주민들의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리고 부산 기사를 쓰면서 쓰시마 섬을 조산(chosan)으로 표기해놓았다.

이들이 대마도를 방문했을 당시 이 섬은 분명히 일본영토가 아닌 조선영토로 보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해석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 학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다음은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의 부산항의 모습과 한국인들에 대한 기사내용;

"부산성의 해안은 전면이 잘 다듬어진 검은 바윗돌로 돼있으며 선박의 정박지는 수심이 깊고 둥글게 자리잡고 있어 입항하는 선박들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박들이 풍랑에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도록 돼 있는 항구였다.

정면에 보이는 작은 동산은 가느다란 전나무들로 덮여 있었으며 항구 주위의 높지 않은 산들은 계단식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진 논, 밭이었다. 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로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성내는 미끈한 긴 겉옷을 걸치고 윗부분이 아주 높은 이상한 검정색 모자를 쓰고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이상한 모자는 대나무를 잘게 쪼게 마치 쇠줄처럼 엮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머리는 뒤로 꼬아 묶어 놓은 모습이었고 너무 높아 불안한 모자를 지탱하기 위해 끈으로 턱 밑을 묶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광주리처럼 생긴 아주 큰 모자(삿갓인 듯)를 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옷은 흰색이거나 표백처리를 하지 않은 삼배 옷이 대부분이었고 여자용 옷처럼 소매가 축 늘어지고 가장자리가 넓게 열려있었다.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바지 아래는 발목을 묶었으며(대님) 면 스타킹(버선)을 신고 짚으로 엮은 이상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우아한 수레(가마인 듯)와 밝은 그들의 표정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으며 낯선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완고하거나 배타성이 적어 보였다.

그러나 부산성을 방문해 보고 싶은 우리의 노력은 거친 돌로 막힌 방파제와 해변가의 군중들로 인해 한 발자국도 배 밖으로 내디딜 수 없었다. 우리가 내민 상륙허가 신청서를 받아 부산성 당국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도 거절되었으며 심지어는 우리와 동행한 중국인 통역과의 대화하는 것도 기피했다."

***아르헨 해군 100년 전에 한국 방문하기도**

이야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가르시아 제독이 쓴 러일간의 동해 해전 기록은 다음해인 1906년 아르헨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한국의 부산항을 방문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르헨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세계최대의 해전 격전지의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해보는 실습장으로 부산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아르헨 해군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1906년 2월 8일 아돌포 마누엘 디아스(Adolfo Manuel Diaz)함장이 이끈 30여명의 해군 사관 생도들은 증기기관 범선인 '쁘라가따 사르미엔또'호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항, 뿐타 아레나를 거처 호놀룰루, 상하이, 여순 항을 항해하고 그 해 5월 29일 부산항에 도착, 6월 17일까지 부산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나가사키, 요코하마, 시드니를 끝으로 같은 해 11월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항한 것으로 사르미엔또호의 항해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아르헨 해군의 최초 한반도 상륙의 기록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해군 전속사진사는 부산항을 유일하게 파노라마 형식으로 촬영 항구 전체 모습을 3장의 사진에 담아 아르헨 해군이 부산항에 보이는 관심도를 반영했다. 아르헨티나 해군 전속사진사가 남긴 부산시내 전경사진은 부산항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

필자가 부산일보에 게재한 이 사진을 본 부산항 역사 전문가인 김영호 한국항만연구회 회장은 "그동안 학계에서는 부산항 목잔교가 1906년 12월 준공되었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이 사진으로 부산항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면서 사진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아르헨 해군이 100년 전에 부산항에 입항했던 사실 역시 부산 향토사 및 부산항사 연구자들 사이에도 알려지지 않고 있던 것으로서 부산항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발굴해 낸 것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은 당시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은 부산이나 동해, 독도 등의 역사기록이 부실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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