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굳세어라 삼순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굳세어라 삼순아

김민웅의 세상읽기 <83>

얼굴은 고운데 이름은 삼순이라 맨날 놀림을 받고 있던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에서는 다들 성인이니 그리 놀리지는 않겠지 하고 기대를 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좌중은 폭소의 도가니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차저차 하면서 지내던 중, 미팅을 나갔다가 상대방 남학생도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이 여학생은 자리를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거리에 나온 그녀는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는 훌쩍 훌쩍 울었습니다. 그래 기사 아저씨가 왜 그리 어여쁜 여성이 우냐고, 누가 그렇게 못되게 울렸냐고 물었습니다. 거 바보 같은 놈도 다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슬프게 하다니 하면서 마치 자신이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런 기사 아저씨의 말이 그래도 따뜻하고 고맙게 여겨졌던지 여학생은 입을 열고 “제 이름 때문에 자꾸 놀림을 받아서 그래요”하고 하소연조로 실토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기사 아저씨 왈, “뭘 그깟 이름 같고 그래. 삼순이만 아니면 되었지.” 아, 가련한 삼순이여.

그러나 이 삼순이가 요즈음 뜨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는 영자의 전성시대가 있었는데, 이제 영자는 가고 삼순이가 온 것입니다. 급속한 산업화의 그림자 속에서 홀로 방구석에서 흐느끼던 영자와는 달리, 삼순이는 첨단의 도시 문화 속에서 억척을 부리며 자신의 운명을 활달하고도 뜨겁게 개척하는 여인입니다. 그건 옛날 배우 도금봉씨가 열연했던 또순이를 연상시키면서도 그저 생활능력만 강조되었던 그녀와 달리 자신의 주견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도 자신이 쟁취해내는 그런 적극성을 뿜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헌데 영자를 울렸던 것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영자란 이름은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었고, 유별나게 촌스러웠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녀의 신분이었고 그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녀에게 한번 붙은 모멸스러운 낙인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삼순이에게 와서 이러한 상황은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영자와 운명이라는 단어는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건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화인(火印)과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순이는 이걸 발랄하게 떨쳐내는 힘을 보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강하고 또한 그 힘으로 도리어 아름다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신분상승을 하게 되는 과정은 역시 신데렐라 식의 도식적 회로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만, 이 모든 것은 결국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성품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자신을 덮치고 있는 현실이 아무리 무겁고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기존의 권위나 기존의 장애를 뛰어넘어 자신이 바라는 꿈을 거리낌 없이 그리고 순수하게 펼쳐나가는 인생은 찬사를 받기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 삼순이는 전혀 촌스럽지 않고 또한 누구에게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녀의 겉모습이나 사회적 시선이 아니라 삼순이 자신의 의지와 활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권력이 일상의 자리에 낮게 내려오고, 권위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며 누구의 발언도 소외됨이 없는 그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권을 주장하는 이는 도리어 지탄의 대상이 되고, 권위를 권력화하는 이들은 시대적 낙오자로 취급받게 됩니다. 삼순이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서민들의 의지와 용기가 주도권을 쥐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자가 시대적 비탄과 아픔의 상징이었다면, 삼순이는 그런 조건을 서슴없이 넘어서는 여인의 힘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등장은 이 땅의 서민들에게 속 시원함과 당찬 용기, 그리고 희망을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드라마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패자 부활전 같은 그녀의 행로에 대해서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까닭이 달리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노무현 정권이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더 이상의 특권과 권위가 세도를 잡는 세상은 이제 종을 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서민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역사가 열려야 한다고 열렬하게 외치면서 집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년이 넘는 지금, 사람들은 “겉절이 정권”이라는 말로 현 정부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기조차 합니다. 겉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투기로 멍든 경제가 서민들을 울리고 있고, 농민과 노동자들이 분을 삭이지 못해 일어서고 있습니다. 사회적 양극화의 위험성을 경고 받은 지도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여당의 정체성에 개혁적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받은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에서 사람들은 삼순이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굳세어라, 삼순아의 소리를 굳세어라, 아무개야라고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정부와 여당은 끝내 잡을 수 없는 것일까요? 많이 안타깝네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