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1월부터 ‘뉴욕통신’을 보내왔던 김재명 기자(프레시안 뉴욕 통신원 겸 분쟁지역전문기자)가 뉴욕시립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최근 귀국했다. 귀국에 앞서 김기자는 전환기를 맞은 쿠바를 취재,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란 제목 아래 12회에 걸쳐 프레시안의 지면을 빛낸 바 있다. 김 기자는 프레시안 기획위원으로서, 앞으로도 국제분쟁을 중심으로 한 분석기사들을 프레시안에 실을 예정이다. 아래 글은 뉴욕통신의 마지막 글로, 재즈와 힙합으로 미 대중문화의 한 축을 차지해온 할렘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았다. 편집자
뉴욕 사람들은 ‘미국인’이라는 이름보다는 ‘뉴요커’(New Yorker)라는 이름에 더 애착을 갖는다. 국제정치의 중심인 유엔빌딩, 국제금융의 중심인 월가(街), 그리고 여러 주요한 문화공간(42번가 브로드웨이 극장가, 링컨 센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등)이 자리한 곳이 뉴욕 맨해튼이다. “뉴욕~뉴욕~굉장한 도시야~” 전설적인 배우이자 가수인 프랭크 시나트라와 진 켈리가 함께 출연하는 뮤지컬 영화 '도시에서'(On the Town, 스탠리 도우넨 감독, 1949년)의 무대는 뉴욕 맨해튼이다. 뉴욕의 중심에 사는 주민들의 자긍심은 크다. 주소가 ‘뉴욕, 뉴욕’으로 돼있으면, 그 사람의 집은 맨해튼 안에 있음을 뜻한다.
센트럴 파크 북쪽에 자리잡은 할렘 지역의 주소도 ‘뉴욕, 뉴욕’이다. 그러나 같은 맨해튼이라도 할렘은 다른 맨해튼 지역과는 크게 다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다르고, 주거환경에서 차이가 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이분화한다면, 할렘은 빈자들의 게토(ghetto)로 여겨져 왔다. 그럼에도 할렘엔 그 나름의 문화적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자긍심이 배어 있다. 미 대중문화의 한 주류인 재즈가 1920년대 이곳 할렘에서 무성한 숲을 이룬 뒤 퍼져나갔고, 1990년대부터 지구촌 청소년들을 열광시켜온 힙합의 산실이 바로 ‘문화 해방구’로 일컬어지는 할렘이다.
할렘의 문화적 다양성은 곧 아프리카 여러 곳에 뿌리를 둔 서로 다른 흑인문화와 스페인의 열정이 녹아든 남미계 문화(Hispanic)가 할렘이란 특수한 용광로를 거쳐 나온 데서 비롯된다. 할렘 자체가 서부지역은 흑인들이 주로 살고, 동북부 지역은 남미계 사람들이 주로 산다. 그래서 할렘 동북부 지역을 특히 ‘스페니시 할렘’(Spanish Harlem)이라고 부른다. 노래 ‘스페니시 할렘’은 세계적인 히트곡으로 40-50대 이상의 한국인들은 지금껏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스페니시 할렘 지역은 미국에 살사(salsa) 음악을 퍼트린 곳이기도 하다. 살사는 할렘 흑인들의 재즈에 큰 영향을 받은 미국음악의 한 장르다.
***“여기가 할렘 맞아?”**
할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범죄와 마약, 실업, 가난, 인종차별 등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들이다. 뉴욕에 8년을 머무르면서 자주 할렘에 들렀지만, 그곳은 언제나 다가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분명히 낮시간 동안 학교 교실 안에 있어야 할 나이의 흑인 청소년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도 흔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필자의 속주머니와 어깨에 걸친 카메라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작은 물질적 욕망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하층민들이 몰려사는 게토’라는 이미지가 강한 할렘은 19세기엔 백인 중산층들의 주거지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대전 뒤의 부동산경기 침체, 1929년 미국을 강타했던 대공황 등으로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집세를 감당하지 못한 그들이 빠져 나가고, 미 남부의 흑인들과 푸에르토리코를 비롯한 중남미 쪽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조금씩 슬럼화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거리의 상점들도 문을 닫는 바람에 할렘 거리의 밤은 더욱 껌껌해졌다.
필자가 처음 뉴욕 맨해튼에 발을 디뎠을 때, 택시를 타고 할렘에 가자고 하면, 운전기사들이 “그곳엔 못 가겠다”고 버틸 정도였다. 대낮에 거리에서 마약을 팔고사곤 했다. 그런 어두운 모습들은 물론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할렘 중심가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 커피점 앞에서 만난 한 백인경찰은 “밤늦게까지 이곳에 머물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이즈음 할렘은 훨씬 안전해졌다. 밤에 ‘마르틴 루터 킹 거리’라 이름 붙여진 125번 가를 외래객이 혼자 걸어도 될 만큼 바뀌었다. 길에서 지갑을 꺼내 1백달러 짜리 지폐가 몇장이나 남았는가를 세보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강도를 당할 염려도 거의 없다.
할렘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지난날 유대인 게토(ghetto)처럼 흑인들만의 게토로 여겨지던 할렘은 변화의 길을 걷는 중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 경기회복으로 고용이 늘어나면서 범죄율 감소, 경기회복에 따른 재개발 바람,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강력한 범죄단속 등이 변화를 가져온 요인들로 꼽힌다. 할렘 재개발 바람 속에, 동서로 가로 지르는 125번 도로를 따라 대형매점들이 들어섰다. 맥도널드 햄버거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 커피 전문점인 스타벅스, 의류 브랜드인 올드 네이비(Old Navy)와 갭(GAP), 비데오 대여판매점인 블록버스터...125번가를 따라 걷다보면, “여기가 예전에 와봤던 할렘 맞아?“라는 물음이 나올 정도다.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사무실(55 West)도 스타벅스 커피전문점 가까이에 있다.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할렘이 재개발되면서 이곳 사람들은 “할렘이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는 말들을 주고 받는다. 영문학자인 해롤드 블룸(뉴욕대 교수)이 펴낸 책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 2004년)에 따르면, 1920년대 할렘 지역의 흑인들은 특히 문학, 미술, 음악 분야에서 뛰어난 창조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재즈는 할렘문학과 더불어 흑인문화를 이해하는 키 워드다. 할렘은 재즈의 산실은 아니지만, 재즈를 미국문화의 한 주류로 우뚝 세운 곳이다. 뉴욕 출신으로 미국을 대표할 만한 다큐멘터리 필름 감독 켄 번스와 제프리 워드가 함께 펴낸 ‘재즈, 미국음악의 한 역사’(2002년)에 따르면, 1900년대 초 미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가난한 흑인노동자들 사이에서 싹을 틔운 재즈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 올라가서 시카고를 걸쳐 1920년쯤 뉴욕의 할렘에서 활짝 피어나기에 이르렀다. 다큐멘터리 필름 감독 켄 번스의 20시간이 넘는 긴 다큐멘터리 ‘켄 번스의 재즈’(2000년)는 할렘 재즈가 미국 문화 속에 지닌 비중을 잘 보여준다.
할렘의 재개발과 더불어 125번가를 중심으로 할렘 곳곳에는 재즈클럽들이 성업 중이다. 할렘 흑인들이 재즈와 관련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에피소드 하나. 지난 1999년 봄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처음으로 할렘 지역에 문을 열었을 때 이야기다. 당시 스타벅스는 할렘을 뺀 뉴욕시 전역에 80개가 넘는 지점들을 두고 있었으나, 할렘에만 지점이 없었다. 스타벅스의 할렘 진출은 따라서 나름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작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스타벅스가 문을 여는 날, 축하행사에서 섹소폰으로 재즈를 연주한 사람은 흑인이 아닌 백인인 케니 지였다. 재즈가 흑인 음악가의 독점물은 아니지만, 할렘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살고 있는 많은 흑인 재즈연주자들이 스타벅스의 케니 지 초청을 못 마땅하게 여긴 것은 이해가 된다.
***눌린 자의 욕구 배설, 힙합의 본고장**
뉴욕 할렘은 1990년대에 지구촌을 휩쓸며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우뚝 선 힙합(Hip Hop)의 산실이기도 하다. 욕망의 배출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던 할렘 빈민가의 10대 흑인 청소년들이 이른바 F-워드(f-word, fuck)나 B-워드(b-word, bitch)가 들어간 욕설과 상소리를 섞어가며 손가락질을 허공에다 해대는 힙합은 짧은 시간 안에 (입시며 취업준비 따위로 모두들 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지구촌 10대들을 열광시켰다. 우리 한국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뜨고 젊은 가수들이 10대들의 배설(排泄) 쾌감을 한껏 자극하지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힙합은 음악으로 그치지 않았다. 몸에 걸치는 옷에서부터 장신구, 춤과 율동에 이르기까지 힙합에 빠져든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뜻하는 이른바 힙합문화를 창출해냈다. 힙합문화는 더 이상 할렘 빈민가의 10대 흑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할렘 거리에 외부인들이 많이 찾아들기 시작한 배경은 힙합 열풍과도 맞물려 있다. 힙합의 산실인 할렘거리를 걸으며 힙합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추며, 할렘 거리에 널려 있는 옷가게나 노점상에서 힙합 패션에 걸맞는 옷들을 골라 사입는다.....이런 모습은 어느덧 할렘의 일상적인 풍속도로 자리 잡았다.
되살아나는 할렘,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는 할렘의 또다른 보기가 다시 문을 열게된 대형 공연장들이다. 근래에 새로 건물 안팎을 다듬고 고친 아폴로극장(www.apollotheater.com), 마찬가지로 새로 단장을 한 아론 데이비스 홀(www.aarondavishall.org)은 할렘 공연문화의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나이든 예술가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세대의 흑인 예술가들이 그 무대에서 나름의 예술적 열정을 발산하는 중이다. 뉴욕시립대학 가까이에 자리 잡은 아론 데이비스 홀 무대에 선다는 것은 곧 미국 연주계에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할렘에 뿌리를 둔 여러 예술단체, 이를테면 할렘 댄스극단, 에보니 오페라단, 할렘소년합창단 등이 정기공연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125번가 선상에 자리 잡은 아폴로극장이 할렘 문화에 지닌 무게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올해로 문을 연 지 92년 역사를 지닌 아폴로 극장은 아울러 많은 명연주자들과 가수들을 배출해낸 곳이다. 듀크 엘링턴, 스티비 원더 등 유명한 재즈연주자 및 리듬앤드블루스 가수들의 공연도 아폴로 극장이 출발점이었다. 그곳에서 열린 ‘아마추어의 밤‘ 공연을 가봤다.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 정도에 따라 아마추어의 연기 우열을 가리는 방식이라 내내 열기 띤 모습이다. 공연이 끝난 뒤 만난 아폴로극장의 한 간부 여직원은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잭슨 파이브‘ 남매, 휘트니 휴스턴이 바로 아폴로극장 아마추어의 밤을 통해 세계적 가수로 떠올랐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할렘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영화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 스파이크 리 감독, 1989년작)는 할렘 지역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무대는 맨해튼 할렘이 아니라 맨해튼 아래쪽인 뉴욕 브루클린 지역이지만, ‘좌절과 분노’라는 흑인사회 바닥에 깔린 음울한 코드를 읽을 수 있다. 브루클린의 흑인폭동을 주재로 삼아 흑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절묘하게 화면에 담은 명작으로 꼽힌다(1990년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작). 흑인들은 이탈리아 피자가게를 박살낸다. 피자 가게 가까이에 있는 한국인 가게에게도 불똥이 튄다. 흑인들 상대로 돈 벌면서도 흑인 지역사회 발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한국인 상인은 흑인들에게 혼이 날 뻔하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할렘이 낳은 비운의 민권운동가 말콤 X의 불꽃같은 삶을 다룬 영화 '말콤 X'(1992년작)의 감독자이기도 하다.
할렘 곳곳의 포인트를 돌아보는 할렘 투어가 문화여행 상품으로 등장, 여행자들에게 할렘의 진수에 보다 깊이 접근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할렘의 역사적 유산들을 돌아보는 할렘 헤리티지 투어(www.harlemheritage.com)는 필자가 독자들께 추천하고픈 문화상품이다. 이 투어는 세 종류로 나뉘어 있다.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투어, 1960년대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이 이끌었던 흑인 인권운동의 현장들을 돌아보는 투어, 그리고 할렘의 동부(이른바 스페니시 할렘)와 서부(흑인 할렘)를 돌아보면서 할렘의 다문화적(multi-cultural) 요소를 체험하는 투어다.
kimsphoto@yahoo.com
(사진 설명 @김재명)
1. 할렘 중심가인 125번가 거리 풍경. 2000년 무렵부터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지만, 빈 건물들이 아직도 많다.
2.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는 할렘 문화의 주요공간 가운데 하나인 아폴로 극장 무대.
3. 할렘 중심가에 자리잡은 스타벅스 커피전문점.
4. 할렘의 산물인 힙합 패션을 한 10대에게 할렘은 욕구불만을 푸는 문화해방구다.
5. 할렘거리의 노점상. 말콤 X, 마틴 루터 킹, 체 게바라의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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