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6년부터 82년까지 아르헨티나 군부의 무자비한 철권통치기간 중 체포 혹은 납치되어 사망했거나 생사ㆍ행방을 알 수 없이 실종된 군정피해자 가족들의 30여년 동안 지속된 과거청산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될 전망이다.
지난 14일 아르헨 대법원은 국회와 사법부가 2003년 무효화시킨 군 사면법과 명령복종법을 확정판결하고 “군정관계자 사면법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국제인권조약에 위배된다”며 ‘위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르헨티나 군정의 과거청산과 피해상황 등은 이미 두 차례(남미리포트 2004년 9월 9일자 20회와 2005년 3월 23일자 46회)에 거처 설명을 했지만 최근 대법원이 군정관계자 사면법은 위헌이라고 확정판결, 선량한 시민들을 상대로 고문과 납치를 자행한 군정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게 된 내용을 알아본다.
지난 83년 군정에 이어 민주화를 이룬 라울 알폰신 대통령과 그 뒤를 이은 메넴 대통령은 군부의 만행이 만천하에 자세하게 드러났으나 통치기반이 허약해 군 고위장성급 몇 명만을 단죄하고 상부의 명령에 복종한 하급관료나 장교, 단위부대장들과 사병들은 단죄할 수 없다는 ‘명령복종법’을 신설,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군정관련자들의 사법처리를 전면 금지시켰다.
당시 아르헨 법조계는 메넴 대통령의 사면령이 위헌이라며 강한 반발을 표명했으나 메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며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사면령을 관철시켰다. 그 후 피해자 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메넴은 재판 중이거나 실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돼 있던 군 장성들마저 사면 복권시켜주어 상당수가 국회 또는 지방정부 수장으로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군정관련 피해자가족들과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2003년 5월에 취임한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잔재 청산을 천명하고 사면된 군 장성들의 재수감을 단행했다. 대통령의 과거청산 의지와 국민여론을 의식한 아르헨 법원은 군부 집권 당시 고문과 납치, 유괴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군 고위장성들을 사면한 대통령령이 위헌이라며 현재 생존해 있는 3명의 퇴역 장성들을 재수감하라고 판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르헨 법원은 이 판결문에서‘사면령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집행돼야 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대통령의 권한보다 법의 권위가 앞선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 후 이 법은 대법원으로 넘어가 2년이라는 세월 동안 9명의 대법관들 사이에서 논쟁을 거듭하다 지난 14일 마침내“군관계자 사면법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국제인권조약에 위배된다”며 위헌이라고 최종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아르헨 대법원은 또 군정관계자가 사면법을 통해 유리한 판결이나 무죄를 선고 받았다고 할지라도 위헌적인 법률에 따른 판결은 효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군정 당시 발생한 모든 사건은 반인륜적인 범죄로서 공소시효가 없다고 판결을 했다. 따라서 현재 아르헨티나 사법부에 체포되어있는 147명의 군정관계자 처벌을 위한 재판이 급 물살을 탈 전망이다.
또한 현재 신원이 확인된 1천여명 이상의 각종 인권유린 범죄 가담혐의를 받고 있는 전ㆍ현직군인들이 아르헨 법원의 소환을 받을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30여년 가까이 실종된 자식들과 손자들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5월 광장 할머니회는 14일 내외신기자회견을 자청, “오늘은 역사적인 날로 세계의 이목이 아르헨티나로 집중되게 했다”며 “이는 아르헨티나 전체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 “나치전범들이 평생 동안 추적을 당했던 것처럼 이제 아르헨 군정관계자들도 평생 추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군 독재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린 까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은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면서 “법을 존중해야 국가가 안정된다”는 짧은 논평을 내놓았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면령 위헌 판결을 놓고 “정치적인 판단과 대통령의 고유권한에 대한 사법기관의 위헌판결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일고 있어 대통령의 권한과 사법부의 권위를 놓고 격론이 일 것으로 보인다.
군부 역시“사면령 자체를 백지화시키지 않고 사면령의 위헌판결과 명령복종법만 폐지한다면 지난 89년과 90년 복역 중이었거나 재판 중 사면을 받은 군정수뇌부는 면책을 받고 그들의 명령에 따른 하급장교들과 사병들만 사법처리 되는 모순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결국 메넴이 서명한 사면령 자체를 백지화시켜야만 진정한 과거청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키르츠네르 정부도 전 대통령이 결정한 사면령의 백지화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문제가 하루아침에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칠레와 우루과이, 콜롬비아 등 이웃 나라들의 군정 과거사 문제를 마무리 짓는 선례로 작용, 남미전체의 군정 과거사 재판이 줄을 이을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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