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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요정, 그리고 역사의 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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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요정, 그리고 역사의 유폐

김민웅의 세상읽기 <80>

누군가 오랜 세월을 벽에 갇혀버린 채 자신의 말과 자신의 얼굴, 그리고 자신의 몸짓을 잊도록 강요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사는 존재는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벽 속에서 걸어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귀신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벽속의 요정>은 연극배우 김성녀의 모노 드라마입니다. 혼자서 몇 사람의 역을 동시에 소화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무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생활 30년만의 첫 모노 드라마를 김성녀는 뜨겁게 담아냅니다. 그것은 관객의 눈물과 결국 뭉클하게 닿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4살짜리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시작해서 벽 속에 갇혀 있는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김성녀가 감당하는 배역은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일인 몇 역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각자의 시선을 통해서 <벽속의 요정>은 우리 시대가 겪어왔던 [벽]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벽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세월의 통증을 쏟아 냅니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일본작가 후쿠다 요시 유키의 원작을 우리의 6.25 전쟁과 분단사로 현장을 바꾼 이 작품은 김성녀의 남편 손진책의 연출로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드는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그건 해방의 공간에서 펼쳐진 이념의 자유와 정치적 격돌의 과정에서 희생된 존재들에 대한 위령제의 느낌을 주기도 하고, 장기수처럼 지내온 우리 역사의 진실, 그 진정한 표정을 드러내주기도 합니다.

러시아 민요를 부르는 것은 위험한 일로 낙인찍혀 있던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냉전의 유령이 우리의 현대사를 얼마나 질식하게 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지주의 아들로서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 행위가 경성제국대학 유학생인 한 조선청년의 인생을 무참하게 궁지에 몰아놓고, 그로 인해 역사는 그를 벽 속에 유폐시켜버립니다.

그것은 사실 그의 안전을 지켜준 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벽 속의 안전은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언젠가는 부수고 나가야 할 숙제였고, 그로써 광장의 함성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벽속의 조선 청년은 아이가 성장하여 여고생이 되고 여대생이 되고, 결국 시집을 갈 때까지 벽 속에서만 존재하는 얼굴없는 자의 삶을 살아냅니다.

그는 자신의 딸의 성장을 벽 안쪽에서 지켜보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딸을 위험에서부터 구해주고 가족의 생계를 기이하게 해결하는 그런 요정이 됩니다. 얼핏 그것은 귀신인 듯 했지만, 그보다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요정처럼 전후의 세대인 딸아이의 마음속에 새겨져 갔던 것입니다.

한번 갇혀버린 존재는 좀체 거기에서부터 나올 수 있는 길을 발견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건 벽 밖의 세상이 변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배우 김성녀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숨가쁜 대사를,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파괴하면서 관객의 영혼에 빛깔이 다채로운 색종이처럼 뿌립니다. 아마도 우린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이리저리 바꾸어 가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숨가쁘게 말입니다.

그녀가 부르는 갖가지 노래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끈질기게 사로잡습니다. 조선의 깊은 가락은 물론이고, 오늘날 현대적 곡조에도 우리의 영혼을 실어 역사의 복판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중앙에 우뚝 서게 만듭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들은 진보의 꿈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립니다.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는 스페인에서만의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벽속의 요정>을 둘러싼 시대는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 영혼을 가두어버리고는 잔인한 미소를 짓습니다.

어느 날, 이 모든 유폐의 사슬이 풀리는 날이 옵니다. 40년의 세월 속에서 맹위를 떨쳤던 냉전의 마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사망신고가 되어,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던 벽 속의 남자는 요정이 아닌, 남편으로 아버지로, 늙은 청년으로 이 세상에 복귀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짐짓 말합니다. 인간의 사랑 속에 하늘의 사랑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말이지요. 그는 그런 사랑의 힘을 믿고 벽 속의 세월을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6.15 남북 공동성명 5주년이 지납니다. 처음의 감격 이후 우린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어두운 벽 속에 가두어버린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세상의 빛 속에 드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단지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벽> 속에 가둘 수 없는 그런 시대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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