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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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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95>

발해(渤海), 저 머나 먼 바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신석기 문명의 끝자락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의 중국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마치 윗니와 아랫니처럼 반쯤 물고 있는 공간에 푸른 바다가 하나 숨쉬고 있었다.

요동반도는 만주에서 남서쪽으로 벋어 나온 반도이고, 산동반도는 중국 대륙의 동쪽에서 동북쪽을 향해 불거져 나온 반도이다. 그 두 개의 반도로 둘러싸인 바다를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바라’라 불렀다. 그들은 ‘바라’ 근처에 살면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더러는 산에 가서 열매를 따기도 하고 더러는 농경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서 식량을 생산하기도 했다.

겨울이면 대단히 추운 지방이었기에 그 곳 사람들은 아침에 뜨는 해가 그렇게 고맙고 대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고마운 해가 이상하게도 어느 날에서부터는 하늘에 떠있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해가 짧아지면 세상은 결국 추워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해는 점점 더 짧아져서 대단히 추운 때가 되면 어쩌면 세상은 이대로 얼어붙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해는 다시 어느 날에서부터는 길어지기 시작해서 따뜻해지더니 마침내 산과 들에 만물이 자라는 때가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해가 길어지고 다시 짧아지는, 따라서 생명이 줄어들고 다시 늘어나는 것, 다시 말해 계절의 순환(循環)에 대해 뚜렷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아무튼 해가 다시 길어지는 것에 대해 한없이 고마워했고, 또 마냥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했다.

그들에게 해는 그냥 해가 아니라 햇님이었다. 그들은 그런 고마운 햇님에게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농경의 비중이 커져가자 제사의 중요성도 커져갔다. 햇님이 화를 내어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농사도 사냥도 모든 것이 끝장이고 종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사가 끝나 수확이 풍성한 늦가을 무렵에 가서 한 해의 수확으로 음식을 만들고 또 다시 햇님이 길어지기를 바라는 제를 지내게 되었다.

산이 많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제를 지내면서 먹고 마시고 춤을 췄다. 높은 산에 올라간 까닭은 아침에 햇님의 손길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천(舞天)이라 기록에 전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들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돋는 방향인 동쪽에 단을 쌓고 제를 지내면서 햇님에게 맹세를 했다. 이는 기록에 동맹(東盟)이라 전해진다. 또 해가 가장 짧아진 12월에 가서 다시 햇님이 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북을 치면서 햇님맞이 행사를 하기도 했다. 이는 영고(迎鼓)라 전해진다.

그들은 제를 지내면서 그 정성으로 햇님이 다시 길어지는 것이라 생각했고 나아가서 그들이야말로 햇님이 보낸 자손들이라고 여겼다. 햇님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은 아침에 해가 뜰 때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이 새들임을 알아냈고, 나중에는 새는 햇님의 사자(使者) 내지는 전령이라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러자 햇님과 새,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마침내 스스로 사냥을 통해 잡은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꽂고 다니게 되었다. 깃털을 단 것은 새를 많이 잡은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조상이 햇님으로부터 왔고 새라는 하는 메신저를 통해 왔기에 자연스럽게 황금 알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황금 알은 둥근 햇님이기도 하고 신령스러운 새의 배를 빌어야 했기에 그 이상의 나은 설명이나 풀이는 없었다.

그런데 새는 이상하게도 검은 새였다. 기이하게 여겨지겠지만,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햇님으로부터 날아왔으니 뜨거운 햇님의 불길에 그을려서 검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또 다리도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나 되는 신령한 새였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삼족오(三足烏)이다.

그 검은 새는 제비이기도 하고 까치이기도 하고 까마귀이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 황금 알이나 검은 새와 연관된 시조(始祖)설화를 가진 모든 무리들은 바로 우리와 아주 가깝거나 바로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신화를 지닌 민족이나 나라를 찾아보기로 하자.

먼저 중국의 고대 왕조인 은(殷) 나라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조상이 현조(玄鳥)로부터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漢字)를 만들었으니 바로 갑골문이다. 그들은 또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라는 십간(十干)을 만들어 썼다.

은을 건국한 사람들은 오늘날의 산동 반도, 그러니까 발해만 남쪽의 태산 근처에서 기원하여 나중에 좀 더 서쪽으로 들어가 박(亳)이라는 땅에 도읍을 틀었다. ‘박’이란 ‘박달’, 즉 밝은 땅이란 말에서 ‘달’이란 글자가 탈락한 것이다. 밝은 땅이란 말에는 또 하나가 있으니 바로 아침의 땅, 즉 아사달이 있다. 아사달은 당연히 옛 조선의 도읍지였다.

아사달과 박달은 뜻이 같은 말이다.

나중에 은이 주(周)에게 멸망한 후,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다시 나라를 세웠으니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이다. 연은 오늘의 북경 지방에 있었으니 바로 발해만 일대였고, 제는 발해 남쪽인 산동반도의 바닷가 쪽에 도읍을 잡았다.

연(燕)나라의 이름은 명칭 그대로 ‘제비’를 뜻한다. 제비는 물론 검은 새다. 나라 이름을 ‘검 은 새’라고 했으니 당연히 우리 민족이다. 그런가 하면 제(齊)나라 역시 우리 민족이다. 제(齊)의 원뜻은 우리말의 장소를 뜻하는 명사인 ‘제’나 ‘데’이다. 바로 우리말인 것이다.

제(齊)라는 한자어를 억지로 우리말의 제나 데에다 연결짓는 것이 억지라 여겨지는 분들을 위해 보충을 하나 하겠다.

배꼽 제(臍)자가 있다. 왜 배꼽을 제(臍)라고 표현한 것일까? 배꼽 제(臍)에서 부수의 육(肉)변은 인체를 뜻하는 것이니 원 뜻은 제(齊)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배꼽은 몸의 정 중앙에 있다. 따라서 제(齊)의 뜻에는 ‘가운데’라는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제(齊)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그냥 땅이라는 의미로 ‘제’ 또는 ‘데’라 불렀다. 이는 구개음화(口蓋音化)라 부르는 말소리 현상이다. 당시로서는 여러 나라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는 곳을 그냥 땅이라 불렀고 그것이 나중에 가서 땅은 세상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으니 ‘가운데’라는 의미로 전화된 것이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전통과 사상은 훗날 서쪽에서 진출해 온 사람들에게도 이어져 그들의 나라를 가운데 나라, 즉 중국(中國)이라 부르게 되는 동기를 제공했다. 따라서 제(齊)란 말은 오늘날 중국의 가장 오래된 명칭이기도 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중국을 두고 과거 중국의 일곱 나라를 통일한 서쪽의 진(秦)나라 이름을 따서 차이나 또는 지나라고 하지만 중국인들은 오히려 우리말인 ‘가운데’라는 의미를 이어서 여전히 중국(中國)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다. 묘한 현실이고 어찌 보면 도둑맞은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이 모든 왜곡의 출발점은 우리 민족이 세운 은(殷)을 서쪽의 황토 고원에서 출발한 주(周)가 멸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춘추전국을 거쳐 진(秦)이 연나라와 제나라를 포함하여 여섯 나라를 병탄하면서 우리 민족의 나라인 연과 제가 중국의 역사(歷史) 속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대강 정리해야 할 것은 중국 문명의 모태와 정통(正統)은 분명히 말해서 발해에 접한 산동지방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황하문명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황하 문명을 꼽고 있는 것은 역사의 오류라고 여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환발해를 둘러싼 문명, 즉 환발해(環渤海)문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문명을 일군 사람들은 햇님과 검은 새를 조상으로 여겼던 사람들의 문명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야말로 세계 4대 문명의 일원인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햇님과 검은 새를 시조로 한 신화를 가진 나라는 중국의 은과 연, 제나라만이 아니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이 계열에 속한다. 따라서 발해 일대에 살던 사람들과 한반도 일대에서 만주에 걸쳐 살던 예맥(濊貊)의 사람들이다. 그중 문명의 주류는 발해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고 이들이야말로 한국과 중국, 나아가서 일본의 모태(母胎)인 것이다.

발해란 말 자체가 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바라’라는 보통명사에 중국인들이 바다 해(海)자를 붙인 것이니 발해라는 말은 ‘바다바다’인 것이다. 그러나 바다나 물을‘해’라고 불렀던 사람들도 우리와 아주 먼 관계는 아니다.

발해만에서 좀 더 서쪽의 황하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바다나 물을‘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다나 강, 그리고 물을 하(河)나 호(湖), 또는 회(淮), 해(海)라고 했다. 다 같은 말이고 발음이다. 여기서 하(河)는 황하라는 명칭 속에 남아있고 회(淮)라는 말은 회수(淮水)라는 양자강과 황하 사이에 있는 강의 이름 속에 고유명사로서 남아있다.

나중에 서북쪽의 진나라가 통일하면서 바다나 물을 수(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서남쪽에서 진출해 온 사람들은 강(江)이라 불렀다. 양자강은 중국 남쪽 사람들이 붙인 명칭이며 멀리는 인도의 갠지스강과도 연결되는 바. 갠지스란 말 자체가 ‘강’이라는 의미이며 원 발음은 ‘강아’(ganga)이다.

발해 일대의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 한자(漢字)라고 부르는 문자의 원형을 만들었기에 한자의 어원을 연구하려면 우리말을 모르고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초기에 생겨난 약 3천 여자 정도의 한자는 그대로 우리말 발음과 뜻을 담고 있다.

동시에 발해문화는 해양 문화이기도 하다. 그들은 바다 멀리 건너편에 신선이 산다는 생각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에도 산해경(山海經)이란 책 속에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다.

또 그들은 낮과 밤이 변하고 해가 길어지고 짧아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음양(陰陽)사상을 다듬어내었고 마침내 오행(五行)론을 만들어내었다. 모두 발해를 에워싼 바닷가 사람들의 창의였다.

발해, 원래는 그냥 우리말로‘바다’는 한반도에서 거리상으론 불과 수백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인천에서 배를 타면 하루 나절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문명의 요람이었던 발해는 오랜 역사의 풍상과 질곡 속에서 너무나도 멀어 그저 아스라하기만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발해 사람들이 만든 음양오행과 중국 서쪽 사람들이 만들어낸 주역(周易)은 대단히 이질적인 사상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역시 역사의 질곡 속에서 두리뭉실 하나로 얽혀져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둘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또 하나의 왜곡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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