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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그리고 지구적 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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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그리고 지구적 타격

김민웅의 세상읽기 <76>

유럽이 아시아로 가는 길은 지중해를 넘어 도달하는 길만이 있다고 여겼을 때, 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 유럽과 인도의 해로(海路)가 이어지는 사건은 일대 지구적 사건이었습니다. 1488년 포르투갈의 바루톨레메우 디아스가 귀항하는 과정에서 이곳을 발견하고 “희망봉”이라고 불렀을 때 이후의 유럽 제국에 의한 식민지 시대는 예고되었던 셈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 역시 아시아로 가는 길을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라는 경쟁의 산물이었습니다. 희망봉의 발견과 함께 이 사건도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산의 중대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지구적 변화로 연결된 이 사건들은 모두 개인사적으로 보면 험난한 도전과 위기의 연속 속에서 이루어진 성취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을 밀어붙이고 있는 시대적 힘은 자본과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을 향한 야망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쉽게 도달하지 못했던 곳을 목표로 삼아 온갖 위험을 무릅쓴 것은 모두 이 야망의 불꽃이 그의 영혼을 태우고 있던 존재들의 선택과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이나 희망봉은 이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계선 밖의 무대였습니다. 따라서 이 무대를 차지하는 사람은 다음 시대의 문을 가장 먼저 여는 존재가 되는 특권을 차지할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그 특권에 대한 열망은 무수한 사람들을 이 행진의 대열에 참여하게 했고 그 가운데 극히 일부 소수만이 이 과업을 완수하는 위치에 서게 했습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젠이 남극탐험에 성공한 이후 그곳은 북극 못지않게 지구의 최남단에 대한 인류의 호기심과 야망의 목표물이 됩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지점에 서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은 좋은 의미로 따지자면 인류에게 진보의 길을 열게 됩니다. 그래서 “탐험”이라는 단어는 지금까지 도달했던 곳보다 더 높고 먼 지점으로 우리를 이끄는 꿈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 욕망으로 채워지거나 자본 또는 무력을 향한 야망으로 변질되어 가면 그것은 그 개인과 함께 그 과정 전체에 암운을 드리우게 됩니다. 복수심과 함께 고래를 잡기 위해 선원 모두를 위험의 지경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모비 딕>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현실의 적나라한 몰골을 목격하게 됩니다.

영화 <남극일기>는 이른바 “도달불가능지점”으로 향한 탐험대의 이야기를 공포 추리물의 형식 속에 녹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상할 수 없는 위험과 체력의 한계, 그리고 대원들 간의 인간적 갈등 등이 서로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이들 남극 탐험대는 80년 전 영국 탐험대가 유일하게 도달했다고 알려진 그 어떤 지점을 향해 목숨을 건 행로를 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행로에는 80년 전 영국 탐험대가 겪었던 두려움과 위험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은 이들 현실의 탐험대에게 유령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은 이들 남극 탐험대원들 하나하나에게 일격을 가해옵니다. 누구도 자신이 최후의 생존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모르는 지경에서, 탐험대 대장의 개인적 열망은 이들 모두의 운명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어갑니다.

대장이 그토록 발을 딛고 싶어 했던 “도달불가능지점”의 현실, 그래서 지구 그 어디든 자신이 도달불가능한 곳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계획은 결국 허망한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이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결말 앞에서 영화는 진정 인간이 먼저 도달해야 할 그 지점이 어디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세계 그 어디든 마음먹으면 미사일이 즉각 그리고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는 소위 “지구적 타격(Global Strike)”을 내세운 미국 부시 정권의 전략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권을 공격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발언은 곧 전쟁을 불사할 수도 있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거대한 제국 앞에서 도달불가능지점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은 인간의 영혼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진실의 지점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망한 야망일 뿐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그것은 이 아름다운 지구를 결국에는 불타는 지옥으로 만들 뿐인 유령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알고나 있기는 한 것일까요?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 해서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제국의 이른바 현자들은 언제쯤 깨달을 것인지, 지구의 진정한 안전을 위해 무언가 새로운 목소리가 드높아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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