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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그리고 노동의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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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그리고 노동의 인간학

김민웅의 세상읽기 <72>

오늘날 당연시 되고 있는 노동법의 조항인 하루 노동시간 8시간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지난 19세기 말, 미국 노동 운동의 과정에서 경찰의 탄압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의 죽음과, 정부 권력과 자본가들이 결탁하여 헤이마킷(Hay market) 시위를 불법적 폭동으로 조작하여 노동운동가들을 사형시킨 비극을 딛고 넘어서서 이루어낸 이른바 “피어린 승리”였습니다.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은 가혹해지는 자본가들의 착취와 핍박에 맞서서 조직화된 노조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내는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1886년 5월 1일,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한 일대 시위에 들어가게 되고 이것이 이후 <노동절>의 기원이 됩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날 성립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운동이 보고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미국 노동자들과의 세계적 연대를 위해 다음 해인 1890년 5월 1일, 세계적인 노동자 시위의 날로 정해 노동절이라는 국제적인 기념일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노동시간의 단축운동이라는 것은 그저 고된 노동에서부터 노동자들을 쉬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에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돈보다 많은 노동을 요구하면서 이익을 탈취하는 착취구조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 강도의 강화, 저임금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동이 자본에 의해 그 운명이 좌우되는 조건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19세기 미국은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에서 노동자들을 무방비의 착취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서구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은 유럽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권리까지 접근하도록 만든 상황에 비해, 미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열악했습니다. 노동운동의 후진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2 인터내셔날이 미국 노동운동에 주목했던 이유도 낙후하고 열세에 처한 미국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의 의미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유럽과 미국 대륙의 노동운동이 서로 손을 잡고 나가면 세계적 차원의 역사변혁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인 노동운동의 보다 근본적인 요구는 다만 착취의 종식이라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동하면 할수록 인간으로서의 성취를 이루어낼 수 없는 노동의 현실을 타파하고, 자아성취를 위한 인생의 확보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 각성을 하고, 자기표현을 하며 또한 이로써 자기 안의 잠재능력을 실현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성취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노동의 경우,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생산적 시간의 박탈을 뜻합니다. 정신적, 문화적 자산을 얻거나 쌓아나갈 수 있는 기회의 상실을 결과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갈파한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작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노동자들의 운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노동시간은 노동자들이 성장하거나 자기 개발을 이룬다든지 또는 건강한 육체의 유지를 위한 시간을 앗아가고 있다. 맑은 공기와 햇볕을 누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간을 훔쳐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인간적 수명 연장에 전혀 관심이 없다. 자본의 관심은 오로지 노동력의 최대한 활용 외에는 없다...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노동자들을 그 연령에 비해 일찍 노쇠하게 만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은 최대한 연장하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인생의 시간은 줄여가고 있다.”

오늘날의 기업들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배려하는 직장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노동자 자신의 자아성취의 차원보다는 기업의 경쟁력으로 파악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긴 하나 그럼에도 진일보한 기업내부의 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노동정책과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경제발전의 신화에 갇혀, 이들의 희생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부 노동귀족의 탈선이나 일부 조직의 권력화 현상을 앞세워 전체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요구를 억압하거나 인간적 존엄성을 존중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어떤 범위와 수준에 놓고 사고하고 있을까요? 이미 150년 전에 자본주의 문명이 인간의 생명에 어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성찰했던 바가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의 사람됨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노동이 즐거운, 그래서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그런 현실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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