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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와 아름다운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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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와 아름다운 세월이여

김민웅의 세상읽기 <71>

그건 압도당하는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얀 바탕에 어느새 산이 불쑥 솟아올라 있었고, 시원을 알기 어려운 시내가 흐르며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군무(群舞)의 약동함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이 그곳에 새롭게 열리는 놀라움이 그득하였습니다.

척하고 내려치면, 그것이 곧 그림인 듯 글인 듯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힘이 붓을 댄 그 순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남아 있다기보다는 계속해서 꿈틀거리며 바라보는 이의 마음과 몸 속에 스며들어 새로운 힘으로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서예전이 주는 감동은 그 서체의 기발함을 넘어서서 글 자체가 곧 그의 존재와 일치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에 집약됩니다. 세로가 1미터 40에 이르고, 가로가 7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서폭에 고암이 일필휘지로 기력을 드러낸 용(龍)자는 웅장함과 소박함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고, 세로와 가로가 그 반대로 폭이 넓은 종이에 출현한 용은, 용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강물이 편안하게 흐르듯 아무렇게나 내려쓴 것 같은 서체가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전체의 균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 고암의 자유로운 영혼 속에 숨쉬고 있는 중심을 만나게 하고 있습니다. 미로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서체는 글씨가 살아 일어나 입체적인 율동을 벌이는 환각조차 주고 있습니다.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글에 이르면, 우린 이국땅에서 평생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과 기원을 담고 살았던 한 노화백의 절절한 심정의 뜨거운 울림을 듣게 됩니다. 고암의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이 이상 다른 글씨를 볼 까닭이 있을까 싶게 서도의 한 최고봉에 오른 감격에 차게 됩니다. 그리하여, 광화문 현판의 글씨를 이왕 바꾸려면 고암의 글씨를 채자(採字)하여 박으면 어떠한가 하는 상상까지 해보게 됩니다.

1904년에 태어나 동양화의 고전적 기풍을 전수받았던 그가 50년대 말, 프랑스로 건너가 세계적 조류를 호흡하면서 일구어낸 고암체는 그 자체로 시요, 화폭이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 못지않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그의 예술혼은 그러나 이 땅의 분단사로 인해 동백림 사건 이후 살아생전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의 질곡으로 슬퍼하게 됩니다.

그의 미망인 박인경 여사가 평창동 산기슭에 세운 이응노 미술관은 불귀의 예술가가 이루어낸 걸작들에게 새로운 호흡을 하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누가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며, 이제 누가 그의 이름을 가벼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추사 김정희를 지나 그에게까지 온 서도(書道)의 절창은 우리가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맹렬한 추위를 견뎌낸 세월을 함께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난히 빛나고 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별 헤는 밤”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인간사 때로 뜻대로 풀리지 아니하고, 힘겨운 고비가 나타나면 그게 언제 끝나려나, 하고 털썩 주저앉기도 하지만, 격식과 틀에 묶여 있던 자신의 영혼을 풀어내 그 마음이 가는 길에 맡기고 생명을 불러내는 노력을 중단하지 아니하면, 아마도 그 여정에 새긴 글자들이 하나하나 일어나 때로 우뚝 산이 되고, 때로 홀연 용이 되며 때로 아 아, 뜨거운 군무를 출는지 누가 압니까?

우리의 별에도 계절이 하늘을 스치면 결국에는 봄이 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벌써 죽은 줄 알았던 들판에 잔디가 새로 돋아나며 가슴 아팠던 겨울을 견뎌낸 세월만큼의 자랑이 솟아서 무성한 풀이 되어 야생의 들판을 푸르게 푸르게 물들이면, 우리가 살아온 여정 결코 헛되지 아니할 것이며 한 획 한 획 그었던 삶의 기록들이 다시 용틀임 치면서 우리를 생명의 절정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고암은 이런 글귀를 남기셨더군요. 신고사의(身孤思意). 몸이 고달프고 외로울 때 인생의 뜻을 새기고 성찰하라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런 마음에서 아름다운 세월이 태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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