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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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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9>

서태후와 격변의 중국 (3)

앞서 얘기했던 어린 황제 광서제는 17세가 되자, 서태후는 짐짓 시늉으로 섭정 직에서 물러나고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젊은 황제는 자신의 권력 기반도 세우지 못한 채 강유위라는 개혁론자가 제시한 정책을 급진적으로 채택한다. 1888년 무술년의 일이라 해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부른다.

먼저 강유위(康有爲), 중국어 발음으로는 캉유웨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연 무오(戊午)
월 경인(庚寅)
일 임자(壬子)
시 경자(庚子)

식신(食神)격 사주이니 총명(聰明)하고 편인(偏印)이 받쳐주니 전형적인 학자의 운명이다. 중국 남쪽의 광동성 출신인데, 청이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마저 패하자 더 이상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싶어 급진 개혁의 필요성을 두루 알리기 시작했다.

진사 시험에 붙은 뒤 북경에 머물면서 고시생들을 규합하고, 열심히 글을 써서 어린 황제 광서제의 눈에 들었다. 광서제는 마침 서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났기에 자신의 정치이상을 펴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강유위는 청말의 재야운동권 인사라 하겠다.

광서제는 강유위가 쓴 “아피득변정기(俄彼得變政記)”, 즉 러시아의 피터 대제가 개혁을 통해 러시아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킨 내용을 읽고 마음을 굳혔다. 여기서 변정(變政)이란 정치 개혁을 뜻한다.

권력 기반은 여전히 서태후가 지니고 있었건만, 철없는 어린 황제는 무턱대고 강유위의 개혁안을 실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는 불문가지(不問可知), 개혁의 실패는 물론 자신은 궁궐 안의 깊고 후미진 곳에 유폐당한 뒤 다시는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바람에 서태후는 이제 섭정이 아니라 사실상 황제로서 행세하기 시작했다.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이 실패로 끝나자 신변 위협을 느낀 강유위는 제자 양계초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강유위는 임수(壬水)인데 무술(戊戌)년이니 편관(偏官) 살(殺)운이라 그럴 법도 하다.

그리고 서태후의 청 조정은 가일층 개혁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차에 이미 허울만 남은 청 제국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은 사건이 발발하게 되니 바로 의화단(義和團)사건이었다.

원래 의화단이란 백련교에 뿌리를 둔 민간단체였다. 홍콩 영화 황비홍 시리즈에도 나오듯이, 백련교 자체가 마니교와 미륵신앙에 연원을 종교적 민간결사로서 조정으로부터 사교(邪敎)로 취급받아 왔기에 의화단 역시 불법 단체였다. 산동지방에 근거를 두고, 권법과 봉술 연마를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백련교의 교리를 익히고 수행하는 무리였다. 그리고 유맹(流氓)으로 변한 다수의 농민들을 받아들여 갑자기 세를 불려갔다.

처음에는 서양 열강의 침탈에 반발하여 그저 반기독교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산동지방의 신임 순무(巡撫)-지방총독-가 그들의 애국심을 인정하자, 서태후는 은근히 그들을 지원했고, 그 바람에 의화단의 무리는 돌연 부청멸이(扶淸滅夷), 즉 청나라를 지키고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자는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1900년 경자(庚子)년에 의화단의 무리가 중국 거류 외국인들을 학살한 일이 발단이 되어 서구 열강들과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서면서 이른바 ‘의화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는 지난 60년 전에 있었던 1840년의 아편전쟁과 음양오행 상 맥을 같이 한다. 한 번은 중국 정부의 대외 항쟁이었고, 이번에는 민간의 대외 항쟁이었다.

중국의 경우 경자(庚子)의 해는 언제나 대외적인 문제로 강한 반발력을 보여주는 해이자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해이기도 하다. 1840년의 아편 전쟁, 1900년의 의화단 사건, 1960년의 대약진운동인데 결과는 모두 참담하다.

대약진운동은 다른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같은 맥락이다. 당시 영국의 산업력을 따라잡는다는 무리한 목표로 시작된 생산력 증강운동이니 역시 대외적인 것이 이슈가 되었던 것이고, 그 바람에 수 천 만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오는 2020년 경자년에 중국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는 무진(戊辰)의 나라인 중국이 경금(庚金)의 해에 토생금(土生金)하여 힘을 내지만, 지지(地支)가 자수(子水) 물이니 강한 물 앞에서 오히려 거꾸로 당한다는 뜻이다. 명리에서 말하는 재다신약(財多身弱)의 형국과도 같은 것이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민족주의는 영웅을 만들 순 있어도 나라를 부강케 하지는 못한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다시 돌아와서, 의화단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다. 서양의 최신예 무기 앞에서 권법과 봉술이 별무소용임은 당연한 이치. 서구 열강들과 일본군은 이를 기화로 북경성과 황궁에 진입하여 보물을 약탈하고 궁을 불태웠다. 대제국 청의 무력함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필자가 아홉 살 때였던 1963년에 의화단 사건을 다룬 영화가 국내에도 개봉된 적이 있었다. 제목은 “북경의 55일”이었고, 찰톤 헤스톤과 에바 가드너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찰톤 헤스톤은 미군 장교로 출연했는데, 자금성의 웅장한 위용과 서태후의 위엄어린 모습, 총과 대포 앞으로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의화단의 무지막지한 돌격, 열강 연합군의 사정없는 학살 장면들이 이어지는 일대 스펙타클이었다. 음악도 무척이나 웅장했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 중국인들이 서양 민간인을 학살했다면 범인을 잡아서 죄를 주면 될 일이지 그것으로 전쟁을 일으킬 까닭이 무엇일까, 왜 중국인들은 그저 칼이나 몽둥이 정도를 들고 연발총 앞으로 뛰어들며 죽어가는 것일까, 그 엄청난 적개심의 원천은 무엇일까?

왜 서양의 군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영화는 정의(正義)가 서양 열강 쪽에 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과연 그 바탕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 등을 도무지 풀어볼 수 없었고 그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버렸다.

필자로 하여금 역사(歷史)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촉발시킨 한 편의 영화가 바로 ‘북경의 55일’이었고, 미처 열을 세지 못했던 어린 나이에 이미 세상은 통제할 수 없는 어지럼들이 난무하는 곳임을 알아버렸던 것이다.

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의화단 사건은 청 제국의 실질적인 종말점이었다. 허수아비 황제와 강한 권력의지를 지닌 서태후를 비롯한 황실 수뇌들은 사건 당시 서안(西安)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취할 수 있는 어떤 행동 대안도 없었다. 그저 서구 열강들과 신흥 강국인 미국과 일본의 처분에만 맡길 뿐이었다.

중국은 그러나 끝내 열강의 직접적인 지배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어느 한 나라가 독식하기에는 열강간의 상호 견제가 너무도 심했기 때문이다. 독식하지 않아도 빨아먹을 단물이 각자에게 나름으로 충분했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장을 얻었고, 독일은 동쪽 아시아 대륙에 진출 발판을 만들었으며, 러시아는 만주를 손에 넣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사실상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고, 미국은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대륙에 서서히 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모두 만족했던 것이다.

이미 허울만 남은 청 제국이었지만, 서태후를 비롯한 청 정부 수뇌들은 나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과거 북방 민족들이 중국에 진출했을 당시에도 중국은 너무도 커서 수도를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서 수 백 년 간 권력을 유지한 전례가 있었기에 열강들 사이의 알력을 잘 이용하면 제국을 이어갈 수 있다는 달콤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인민들은 생각이 달랐다. 원래 청이란 만주족의 나라가 아니던가? 자존심 강한 한(漢)민족들은 이 기회에 한민족에 의한 나라를 세울 것이며, 서양의 힘과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여 부강한 새 나라를 만들어보자는 강렬한 희망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일부가 바로 혁명파였다. 모든 노력이 좌절된 이후, 남은 것은 혁명을 통해 새 나라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이제 본격적인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고, 이를 대변해주는 사상이 바로 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三民主義)였다.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이 바로 3민인데, 여기서 민족이란 한(漢)민족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민권이란 서구 민주주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민생이란 모든 사상과 제도, 기술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데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젊은 나이로 광서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이제 세살 밖에 안 된 부의를 황제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직후 서태후 역시 숨을 거두고 만다. 또 부의는 불과 몇 년 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제위에서 내려왔다. 청 제국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러면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사주를 살펴보고 끝을 맺기로 하자.

연 병오(丙午)
월 경인(庚寅)
일 임오(壬午)
시 임인(壬寅)

연의 병화(丙火) 재(財)가 워낙 드세니 재다신약(財多身弱)에, 경금(庚金) 인수를 극하니 그 큰 재물, 즉 황제의 자리가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미 다 지나간 영화(榮華)의 씁쓸한 에피소드인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부의는 죽은 후에 화장(火葬) 유골이 1995년 중국 정부의 선처로 북경의 서쪽 교외에 있는 ‘청서릉’에 함께 묻혔다는 점이니, 저승에서나마 조상들을 만나 그 서러운 한을 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면 다음 글부터는 주인공을 바꾸어 손문과 장개석, 모택동이 활약하는 중국을 보기로 하자.

(이번 달이 경진(庚辰)월이다. 일간(日干)이 경금(庚金)인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이번 달에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북핵 문제는 물론 우리 민족의 장래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전향적인 판단이 내려진다면 오는 6-7월에 문제 해결의 단초가 가시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싶다. 단군 할아버님이 보우하사, 부디 현명한 판단이 내려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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