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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우화와 위장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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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우화와 위장전입

김민웅의 세상읽기 <70>

톨스토이의 우화(寓話)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느 한 사나이에게, 하루 종일 달려서 발이 닿는 곳이면 그 땅의 크기가 어떠하든 모두 그의 것이 되게 하겠다고 하자 그는 진종일 뛰게 됩니다. 뛰고 또 뛰면 그만큼 자신의 땅이 늘어나는 것은 그에게 놀라운 기쁨이었고, 희망이 벅차게 부풀어 오르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해가 기울면서 그도 이제 기운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단 한 치라도 더 얻을 요량으로 마지막 기력을 다해 달립니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지점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도달하면 이제 남부럽지 않은 대토지 소유자가 되어서 세상에 큰 소리를 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그는 사력(死力)을 다합니다.

결국 그는 목표를 이룹니다. 그가 뛰었던 만큼 획득한 결실이 이제 모두 자신의 것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감격해하면서 환희에 찬 순간, 그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숨은 그만 끊어질 듯했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그는 어느새 밤이 되었나 하고 여겼고, 그의 심장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순간, 그는 풀썩하고 스러지더니 자신이 겨냥해왔던 목표지점 바로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으나, 그 이룸을 누릴 그 자신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달린 만큼의 땅이 아니라, 그의 몸이 누워있는 크기의 땅만 자신이 묻힐 곳이 되어버린 것 밖에 그가 얻은 것은 없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있는 말씀처럼, 온 우주를 다 얻는다 해도 자신의 생명을 잃으면 그 얻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톨스토이의 우화는 다 잘 알고 있듯이 땅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모르는 채, 어리석은 경주에 빠진 인간의 현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문제 자체가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뛰는 만큼 자신의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논리입니다. 따라서 문제 자체가 근거 없는 허구라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뛰는 것만큼 세상의 재물은 너의 것이 될 수 있다고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 대세입니다. 남들보다 빠르고 남들보다 더 멀리, 그리고 남들이 뛰지 않을 때에도 열심히 뛰면 그 성과는 모두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신화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신속할 뿐만 아니라, 더 큰 규모로 달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일단 이러한 추세가 일반화되면, 방법은 매우 다채로워집니다. 갖가지 방식의 술수가 동원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을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까의 우화가 주는 교훈을 잘 새겨보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화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땅에 대한 욕심을 과도하게 부린 것이 사나이의 비극의 원인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화에 나오는 사나이의 어리석음은, 그 달리기를 자신이 했다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 달리기를 자기가 직접 할 것이 아니라 남에게 시키고 그 달린 성과를 자신이 차지하면 그로써 자신의 생명도 보존하고 땅도 자신의 것이 될 텐데 우화의 사나이는 우직하게 그 모든 것을 다 자신이 감당하려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 달리기를 대신 한 자가 생명이 끊어지기라도 한다면, 그 보상 정도야 얻은 땅의 일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은 이렇게 남들을 뛰게 하는 식으로 남들이 대신 그 목표를 달성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자신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다 실제로 자신이 뛴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위장전입이라는 것이 뭐 별거겠습니까? 남들 뛰게 하고 자신이 뛴 만큼의 땅을 달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사태이지요.

이 나라 귀족사회의 진상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직에 오르는 귀족사회가 어떤 생활을 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의 달리기를 해왔는지가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 나라의 외교적 대리인으로 미국에 가 있는 한 공직자의 재산증식까지도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달리기는 뛰어봐야 벼룩이 되고, 힘 있는 사람들이 달리기, 또는 대신 달리기 하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점프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점프가 눈감아지는 세상, 톨스토이의 우화가 거꾸로 읽혀지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꾸로 읽혀진다 해도 여전히 내려지는 동일한 결론은, 인간이 결국 최후로 드러눕게 되는 땅의 크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지요. 남게 되는 것은 그의 이름이 명예가 되느냐 아니면 치욕이 되느냐로 모아집니다. 어떻습니까? 욕심부리지 않고 살 만큼의 땅위에 명예롭게 자신의 이름이 끝까지 남는 것이 진정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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