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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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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2>

에밀레종의 정치학

“무릇 지극한 도(道)는 형상의 밖에 있어 보아도 능히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대음(大音)은 천지의 사이에 진동하나 들어도 능히 그 울림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기설법(隨機說法)인 방편가설(方便假設)을 열어 진리의 깊은 이치를 관찰하시고, 신종(神鐘)을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속칭 에밀레종으로 불리우는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銘文) 첫머리이다. 일승의 원음, 자못 철학적인 이 말을 이화여대 강우방 교수는 “절대적 진리의 소리로 일음(一音)이지만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두루 들리는 소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은 무엇보다 그 소리의 장엄함으로 유명하다. 웅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장중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구구한 표현들이 있지만, 실제 종소리는 그 어떤 언어로 된 표현도 훌쩍 뛰어넘어 우리 가슴속으로 바로 파고듦을, 에밀레종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 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난 93년부터 타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규동 선생이 녹음, 편집한 '한국의 범종'이라는 CD에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가 국내의 다른 범종 소리와 함께 들어 있어 맛뵈기로 들을 수 있을 따름이다.

성덕대왕 신종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소리 대신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맑은 겨울날 아침이나 저녁 무렵에 경주박물관을 찾아가 종각 앞에 서면 종 표면에 장엄된 많은 조각(彫刻)들을 만날 수 있다. 종각 안으로 낮게 비쳐드는 햇빛이 또렷이 되살려내는 몸통 하대(下帶)의 보상화문이나 당좌의 연화문 등의 모습, 특히 비천상의 현란한 자태에 우리는 넋을 잃지 않을 수 없다. 또, 빛이 옮겨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비천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소 신종이 감추고 있던,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다, 빛의 상태에 따라서는 어렴풋이 명문이 읽히기도 한다.

성덕대왕 신종은 『삼국유사』에서 딱 한번 언급되고 있다. 탑상편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조가 그것으로 봉덕사종이 곧 성덕대왕 신종이다. 이 조에는 “(경덕왕이) 구리 12만근을 들여 선대 임금 성덕왕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아들 혜공대왕 건운이 대력 경술 12월에 관원에게 명하여 기술자들을 모으게 하여 종을 완성시켜 봉덕사에 안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 관련 있는 기사로는 기이편 ‘성덕왕’조에 “(성덕)왕이 태종대왕을 위하여 봉덕사를 창건하고 7일 동안 인왕도량을 열고 크게 사면하였다.”라는 짤막한 귀절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성덕대왕 신종 주조와 관련된 사실만 간략하게 적혀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신종이 만들어진 동기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경덕왕이 신종을 주조키로 한 데에는 선왕에 대한 추선(追善)이라는 이유 외에 다른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경덕왕은 즉위 초부터 당(唐)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패강 이남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고 획기적인 국학 진흥책을 시행하는 등 매우 의욕적인 정치를 펼쳤는가 하면, 석불사와 불국사를 창건하고, 황룡사 대종 및 분황사 약사여래상을 주조하여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개혁 과정에서 진골 귀족들을 배제하여 그들의 불만을 사게 되는데 진골 귀족들은 각종 개혁에서 중국식 제도를 모방하는 경덕왕의 이른바 한화(漢化)정책에 특히 반발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성덕왕의 36년 치세를 신라 역사를 통하여 손꼽을 만한 태평성대였다고 보고 있으며, 경덕왕이 한화정책으로 대표되는 정치개혁과 아울러 성덕대왕 신종 주조를 추진했던 데에는 성덕왕 대에 절정에 달했던 전제왕권을 다시 한번 확립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는 성덕왕에 대하여 “왕의 투철한 애민정신이라든가, 근정(謹政)에의 남다른 열기로 미루어볼 때 확실히 성군(聖君)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경우,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의례적 수사(修辭)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덕대왕의 덕(德)은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으며, 그 이름은 해와 달처럼 높이 빛났습니다. 왕께서는 항상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발탁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고 예(禮)와 악(樂)을 숭상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하였습니다. 들에서는 농부들이 천하의 대본인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 사고파 하는 물건에는 사치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풍속과 민심은 금옥(金玉)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는 문학과 재주를 숭상하였습니다. …… 40여 년 왕위에 있는 동안 한번도 병란으로 백성들을 놀라게 하거나 시끄럽게 한 적이 없는 태평성세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방 이웃 나라들이 만리의 이국으로부터 와서 주인으로 섬겼으며 오직 흠모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겨누고 넘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덕왕의 경우, 정치개혁이 진골 귀족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태평성대에의 꿈은 좌절된다. 재위 후반부에 이르러서 경덕왕은 즉위 초의 의욕을 잃고 정치를 소홀히 하던 끝에 4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삼국유사』 기이편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끝 부분에 그려지고 있는, 후사(後嗣)에 집착하는 경덕왕의 모습은 이 무렵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이 미처 신종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후, 혜공왕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 만월부인이 혜공왕을 대신하여 신종 완성에 힘을 쏟는다. 이 무렵에는 이미 왕실이 힘을 잃어 버려서, 각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이 33일 동안이나 포위 당하는가 하면 그 여파로 96명의 각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어지러웠고, 그 2년 후에는 대아찬 김융의 반란으로 왕권이 붕괴 위기에 이를 정도로 정치 상황은 심각해졌다. 이런 와중에서 혜공왕 7년(771년) 12월 성덕대왕 신종이 완성되어 봉덕사에 안치되지만 신종으로 왕실의 실추된 권위를 되찾기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성덕대왕 신종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혜공왕 10년에 신종 주조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양상이 왕의 반대파로 돌아서고, 혜공왕 12년 정월에는 반대파의 압력으로 경덕왕이 중국식으로 고친 백관(百官)의 칭호가 모두 복구되면서 왕실은 허울로만 남기에 이른다. 그리고 혜공왕 16년, 김지정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김양상이 이를 진압한 후 혜공왕까지 살해하여 중대(中代) 신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서 다시 『삼국유사』로 돌아가 보면, 경덕ㆍ혜공왕 2대에 걸친 성덕대왕 신종 주조는 성덕왕의 봉덕사 창건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대에 완성된 성덕대왕 신종은 원래 경덕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성덕왕을 위하여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고, 이 종이 안치된 봉덕사는 성덕왕이 자신의 증조부 태종 무열왕을 위해 지은 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신종에 장식된 음통과 용뉴를 신문왕 대 ‘만파식적’의 구현으로 보게 되면 신종의 주조에는, 중대 전제정권의 발판을 마련했던 문무왕과 신문왕에 대한 추선도 함께 포함되고 동시에 “성왕(聖王)은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만파식적의 이념도 덧붙여지게 된다. 이쯤 되면 성덕대왕 신종의 주조에는 태종 무열왕에서 문무왕과 신문왕을 거쳐, 다시 성덕왕, 경덕왕, 혜공왕에 이르는 신라 중대의 정치사가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성덕대왕 신종은 중대 왕실을 대표하는 정치적 상징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을 읽다보면, ‘왕족(王族)을 무성케 하여 달라'는 발원 대목에서 혜공왕의 최후가 애처롭게 떠오르면서,‘지극한 도’를 찾고,‘맑은 진리의 소리’를 듣는 일이 문득 허망해지기도 한다. 명문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원컨대 이 오묘한 인연으로 존령(尊靈)을 받들어 도와서, 맑은 진리의 소리를 듣게 하고, 설법이 없는 법석(法席)에 올라,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뛰어난 마음을 맺어 절대적 진리의 세계에 들게 하며, 나아가 왕족(王族)을 금나무 가지에 맺혀 영원토록 무성케 하여 나라의 대업이 철위산(鐵圍山)처럼 번창케 하고, 모든 중생은 지혜의 바다에 함께 타고 티끌 세상을 벗어나 깨달음의 길에 오르게 하소서.”

주: 신종 명문의 번역에 있어 처음과 세 번째 부분 인용은 이화여대 강우방 교수의 번역을, 두 번째 부분 인용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지관 원장의 번역을 사용했습니다.

* 사진 설명은 파일제목 그대로, 성덕대왕 신종 비천 1, 2, 3으로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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