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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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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8>

서태후와 격변의 중국 (2)

태평천국의 난리가 끝난 후, 서태후의 섭정 체제 아래, 공친왕을 필두로 한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이른바 양무(洋務)파들은 열심히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에 진력했고,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청은 잠시 부활의 기미를 보였으니 이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부른다 했다.

양무운동은 처음에 태평천국의 난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근대화 흐름으로서 대략 1861년 정도를 기점으로 한다. 이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근본으로 하되 기술은 서양의 것을 가져다 근대화하자는 사상의 실천 운동이었다.

마침 이 때,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의한 새로운 개혁의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흥선 대원군이 한창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개화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바로 이 언저리가 한ㆍ일ㆍ중 동북아시아 3국의 운명이 크게 엇갈리기 시작한 지점이다.

메이지 유신이란 그 본질에 있어 죠오슈(長州)나 사쓰마(薩摩)와 같이 도자기 산업으로 외화를 축적한 지방세력, 이른바 다이묘(大名) 밑에 봉직하던 진취적인 하급 무사들이 주동이 되어 수 백 년 된 막부 통치를 엎어뜨린 급진 쿠데타라 할 수 있다.

막부의 쇼군이 사실상의 통치자였기에 그들은 쿠데타의 명분으로서 잊혀져있던 천황(天皇)-사실상의 제사장을 받들고 아울러서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왕양이’의 발상으로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죠오슈나 사쓰마 번의 신흥세력들은 천황을 세운 후, 어느 순간 서양의 힘과 기술을 모방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이미 막부의 통치가 무너진 터이고, 천황은 사실 허울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서양 선회를 막는 반대세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쿠데타를 성공시킨 세력은 권력을 잡게 되면 으레 부를 누리면서 다시 타락하거나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기 쉬운 법인데, 이번에 쿠데타를 성공시킨 하급 무사들은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그들은 안위와 부귀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그 밑바탕에 강렬한 신념과 정열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바로 여기서 일본은 중국과 한국을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중국 청 조정의 양무파들 역시 나름으로 열심히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특히 이홍장이 만든 북양수사(北洋水師)-수사는 해군을 말한다, 최근 인기 좋은 ‘불멸 이순신’드라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를 이끌고 있다-는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

북양수사는 영국으로부터 최신예 전함을 도입하고, 훈련과 체계도 서양인 교관이 맡았기에 대단히 근대적인 해군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동치중흥’의 빛나는 상징이었다.

동치제가 어린 나이로 1874년에 사망하자, 을목(乙木) 서태후와 계수(癸水) 공친왕의 상생 체제는 다시 서태후의 누이와 황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황제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광서제였다.

동태후는 물론 착한 성격이라 허울이었을 뿐이니, 서태후의 권력은 순항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간의 성과가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청일(淸日) 전쟁이다.

청일 전쟁은 1894년에서 다음 해에 걸치고 있으니 갑오(甲午), 을미(乙未)의 운이다. 갑과 을, 두개의 목 기운이 무토(戊土) 중국을 누르는 운이니 결과는 뻔하다.

이 전쟁은 동학 혁명을 진압하느라 허둥대던 조선 조정과 민비 일파가 마침 조선에 머물던 이홍장의 막료 ‘원세개’의 말에 넘어가 청의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전에 갑신정변 실패 이후, 또 다시 조선 진출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에게 있어 이 일은 좋은 핑계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에 있는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출병을 강행했던 것이고, 내심 여차하면 청군과 일전을 겨루어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되찾자는 심산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원세개(袁世凱)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니 우리와도 연관이 있다 하겠으며, 나중에 청이 쓰러진 후 세워진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었고 다시 황제가 되고자 애를 쓰다가 실패하고 죽은 대단한 풍운아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주를 한 번 살펴보자.

연 기미(己未)
월 계유(癸酉)
일 정사(丁巳)
시 정미(丁未)

1859년 생으로 부친이 이홍장과 막역했던 관계로 그 막료로 일하면서 입신출세했다. 사주를 봐도 대단한 야심가임을 알 수 있다. 머리 회전이 뛰어나고, 배포도 크며 재운(財運)이 강하니 욕심이 땅보다 두껍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일 전쟁의 실패로 이홍장이 물러간 후, 그 뒤를 맡아 사실상 청 정부 군대의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1911년 중국 무창-오늘날의 무한-에서 일어난 신해혁명 당시 손문과 협상하여 민국(民國)을 세울 때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 때가 신해(辛亥)년이라 그에게는 편재(偏財)운이고 대운(大運) 또한 무진(戊辰)운이라 상관생재(傷官生財)하여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친위 쿠데타를 통해 민국을 다시 제정(帝政)으로 바꾸어 황제가 되려 하다가 반대에 직면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으니 그 때가 1916년 6월, 병진(丙辰)년 갑오(甲午)월이었다.

병화(丙火)와 갑목(甲木)이 들어오니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고 열통이 터져 죽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양 없고 성미 못된 자의 말로였다. 사주 상으로 볼 때, 뇌일혈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오늘날 서울 명동의 중국 대사관 터를 잡은 사람도 원세개였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난 점이 있으니. 근대 중국의 역사에서 큰 인물들은 모조리 태어난 날이 정화(丁火)였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손문이나 모택동, 장개석, 그리고 원세개까지 모두 일간(日干)이 정화(丁火)이다. 중국은 무진(戊辰)의 나라인데, 정화는 무토(戊土)를 생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다시 돌아가서 일본이 청일 전쟁 당시 어떤 생각을 지녔었는지는 건건록(蹇蹇錄)이라는 책 속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당시 일본의 외무장관이던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지은 책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일본의 시각에서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기에, 구한말의 아픈 역사를 알고자 하는 분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다.

아무튼 청일 전쟁에서 청 정부가 자랑하던 이홍장의 신식 군대와 북양 해군의 함대가 전멸하고 말았는데 이는 대단한 후유증을 가져온다. 이는 양무운동이 사실상 실패했다는 것을 뼈아프게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북경에 관광 가시면 ‘이화원’이라는 끝내주게 풍광이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땅을 파내어 호수를 만들어 ‘곤명호’라고 하고 그 흙으로 산을 쌓아 ‘만수산’이라 한다.

중국 운남성-예전에는 곤명이라 했다-의 아름다운 호수를 본 땄기에 곤명호이고, 만수무강하자고 만수산이라 했다. 수많은 회랑과 호수를 잇는 다리, 아름다운 수목들로 인해 중국 조경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보아도 이 이화원을 보지 못했다면 북경 관광을 못한 셈이다.

그런데 이 이화원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의 출처가 재미있다. 바로 북양해군을 증설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이었던 것이다. 바로 국방비를 서태후가 이화원을 짓는 데 전용했던 것이다.

북양해군은 1885년 무렵이 되자, 영국과 독일로부터 최신예 전함을 구입하여 막강 위용을 과시하였으나, 그 이후 여기 저기 부정부패가 발생하고 서태후가 뜯어가는 등등 비용 운용이 부실해지면서 병사의 훈련이나 포탄의 공급, 부품의 구입 등 전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예산이 그런 식으로 낭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청일 전쟁에서 겉으로는 청이 일본보다 해군력에서 훨씬 강해보였지만, 운용 면에서는 맞수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육군 역시 신식 장비 면에서 청이 일본보다 못할 것이 없었으나 숙달도와 훈련, 보급에서 일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비유하건대, 일본은 소형차를 사서 기름 치고 부품도 갈면서 유지를 잘 한 셈이었고, 청은 3000 cc 급 고급차를 사서 유지 정비를 소홀했던 바람에 정작 경주가 벌어지자 청의 대형차는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겉만 근대화였던 청에게 있어 오늘날 '경제성공학(Engineering Economy)'에서 말하는 '소유 및 유지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과 같은 개념이 없었던 셈이라 하겠다.

양무운동이 허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당황을 금치 못하던 서태후에게는 곧 이어 권력기반에 커다란 변고를 맞이한다.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위기가 오는 야구 경기와도 같이 말이다. 그 뒷얘기는 다음 글에서 잇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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