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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역사를 찾아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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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역사를 찾아서 (상)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51>

***탱고 춤 속에 녹아 든 흑인노예들의 슬픈 역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의 탱고 춤과 음악이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탱고 춤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탱고교습소와 학원 그리고 탱고 테마호텔과 테마관광 등 탱고열기가 아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니발 이바라 부에노스 시장은 최근 한 공식석상에서 “탱고야말로 굴뚝 없는 부에노스 시 최고의 산업”이라고 했을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 정부는 매년 탱고국제대회와 축제 등 이벤트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한국 역시 탱고의 이런 열기는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해 Bs.As탱고월드컵 대회에서는 한국의 이한ㆍ한경아 조가 1등을 차지하기도 했고 미스코리아 출신인 손민지양이 탱고 춤에 도전을 해 전통탱고 전용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춤 탱고, 그러나 그 탱고의 역사와 기원에 대해서는 ‘탱고의 고향’으로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 학자들도 서로간 그 해석이 엇갈린다. 현지어인 까시떼쟈노로 ‘땅고’라고 불리는 탱고 춤은 이미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의 축제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의 각종 자료에는 탱고가 이탈리아의 남부 음악, 쿠바의 아바네라, 아프리카의 깐돔베, 스페인의 플라멩고, 라 빰빠스의 가우초 춤 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주장을 펴고 있다.

왜일까. 어쩌면 아르헨티나는 탱고의 기원과 흑인노예들의 역사는 드러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가 탱고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여년 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르헨티나의 전통적인 한 외교관가문의 아파트를 방문하고 난 뒤부터였다. 손님을 맞이하는 그 집 응접실에는 외교관 가문답게 세계 각국에서 수집된 골동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필자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4폭짜리 청자로 된 중국병풍과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아주 낡은 하나의‘북’이었다.

중국 원 시대에 만든 황실용 청자병풍의 규모에 놀라면서 “저 북도 동양에서 수집한 것이냐”는 질문에 그 집주인은 ”아프리카에서 수집한 것인데 현지에서‘땅고’라고 불리며 그 부족의 이름이기도 한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부족축제 때마다 땅고라는 춤을 추는데 수십 명이 손을 잡고 서로 돌아가면서 아주 흥겹게 스텝을 밟는 게 특별히 인상 깊어 보였다”는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르헨티나 땅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 집주인은 “글세 우연의 일치이겠지 뭐 별다른 의미야 있겠느냐”며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아르헨티나 탱고와 아프리카부족의 땅고 간에 분명한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 부분에 대한 추적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다 탱고가 결정적으로 흑인노예들의 춤이라는 확증을 갖게 된 건 부에노스 시 소재 국립탱고박물관과 국립도서관을 방문한 뒤부터였다.

이 박물관에서 필자의 눈길을 잡은 건 1900년대 초 탱고악단을 만든 비센떼 그레꼬라는 스페인계 이민자(끄리오죠)의 역사와 부에노스 시 건축 당시의 자료들이었다. 이 박물관의 자료들은 전통 끄리오죠(해외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사람들)음악이 오늘날 탱고의 효시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부에노스 시 건축 당시 노동자들과 부두노동자들 사이에서 땅고 춤이 유행을 한 게 오늘날 탱고의 시작”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부에노스 시 건축 당시의 노동자들’이라면 1800년도 중반 아프리카에서 대거 아르헨티나로 팔려온 흑인노예들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으로 국립도서관을 방문, 당시의 자료들을 뒤져보기로 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지방정부들과 연방정부간에 극도의 혼란을 거치며 서로 전쟁까지 불사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건설에 들어간다.

1853년 훌리오 로까 장군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시 건설에 착수할 당시 건설현장의 인부들은 아프리카에서 사온 노예들이었다. 북미와는 다르게 아르헨티나노예들은 개인소유라기보다는 정부소유였던 것이다. 따라서 건설현장에 대규모로 투입이 됐고 이들은 집단으로 수용되었으며 주말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집단수용소는 지금‘탱고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보까 항 주변이었다. 보까 항은 건축자재와 부에노스 시 거리 전체를 돌로 깔기 위해 유럽에서 들여오는 벽돌모양으로 깎은 천연석들을 하역했던 부두로서 이들 노예들이 거주하고 부리기에는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주말에 자유를 획득한 이들 노예들은 한데 어울려 자연스럽게 고향의 축제를 재현하게 되었고 땅고라는 북을 두드리며 땅고 춤을 추었던 것이다.

그러다 시 건설이 끝나고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면서 유럽이민자들이 대거 아르헨티나로 몰려오자 단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이 흑인노예들은 일자리를 이탈리아와 스페인계 노동자들에게 빼앗기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더욱이 188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시내에 전화가 가설되고 2년 후 전기가 들어오자 이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말썽꾼들로 변모해 가게 된 것이다. 유럽의 기술자들과 이들간에 언어의 차이와 문명화된 기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 노예들은 전화선을 망쳐 놓거나 전기에 감전되어 사망하는 숫자가 늘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들도 석유와 물을 구분하지 못하여 석유난로에 물을 가져다 넣고는 불이 붙지 않는다고 주인에게 호소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생겨났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흑인노예무용론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고 정부는 이들 처리에 골머리를 앓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일자리를 잃은 이들 흑인노예들은 점점 단체화되어 대규모 축제를 벌이는가 하면 가끔씩 주변농장을 약탈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1890년대 말 부에노스에 파견된 스페인 천주교감독관은 “급증하는 흑인노예들의 약탈사태와 대규모 춤 축제로 인해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사진1.아르헨티나 탱고는 굴뚝 없는 최고의 산업이라고 설명하는 아니발 이바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김영길

2.아르헨티나로 팔려온 흑인노예들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청.

3.흑인노예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스페인 감독관과 정부관리들의 기록을 보관중인 국립도서관 입구.

4.탱고의 효시라는 가우쵸 춤. 탱고라기보다는 플라멩고춤에 가깝다.

5.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현대탱고 춤의 멋진 피날레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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