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소설 장르 중에 'bodice ripper'라는 표현으로 칭해지는 장르가 있다. 직역하면 '보디스를 찢는 것'이라는 뜻인데, 여주인공이 남자로부터 성적으로 거칠게 다뤄지는 장면으로 다소 푸짐하게 채워진 로맨스소설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건 눈물을 짜내는 멜로물을 뜻하는 'tearjerker'와 관용법상 같은 형식의 표현이다.)
대체로 역사소설을 흉내 낸 이 장르의 고딕 풍 소설의 여주인공은 어김없이 풍만한 몸매를 가진 외로운 미인이며, 어떤 형태로든 위기나 곤경에 처해있다. (이런 여성의 유형을 'damsel in distress'라고 한다.) 여기에서 "성적으로 거칠게 다뤄지는" 것은 이런 소설의 주 독자층인 여성들의 판타지로 받아들여진다. 막연하게 백기사를 기다리는 그런 여주인공에게 무슨 그리스 신화에서 나올법한 근육질 남성이 나타나 그녀에게 화끈한 색정의 진수를 보여주고 그녀를 위기에서 건져내 주는 것이 이들 소설의 공통된 전개방식이다.
'Bodice ripper'로 분류되는 소설들은 대부분 로맨스소설 장르에 속한다. 미국에서 로맨스소설은 스스로 3류 소설을 자처하는 장르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대중성과 보편성이 보장되어야 많이 팔리기 때문이다. 로맨스소설은 배경 및 관계설정을 비롯한 '8가지 불가결한 요소'가 공시될 정도로 엄격히 포뮬러화되어 있다. 난해한 문장이나 지나치게 문학적인 표현, 그리고 풍자 또는 아이러니 따위는 금물이다. 이것은 작가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마케팅의 차원에서 치밀하게 조사되고 분석된 인구통계적 수치에 근거하여 로맨스소설 전문 출판사들에 의해 확립된 원칙이다.
로맨스소설은 미국 페이퍼백소설 시장의 절반, 전체 대중소설시장(하드커버 등 포함)의 3분의1을 차지한다. 미국로맨스작가협회(RWA) 통계에 따르면 로맨스소설은 2003년 한해 동안 2천93개의 타이틀이 출간됐고, 총 매출은 14억 달러에 달했으며, 독자 수는 북미에서만 5천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독자는 49.5%가 기혼여성이며, 35-54세가 42%, 대졸(4년제) 미만이 69%를 차지한다.
<사진>'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로맨스소설의 표지.
따분한 통계를 이같이 늘어놓는 이유는, 1992년에 나온 로버트 제임스 월러(Robert James Waller)의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가 어떻게 그토록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누릴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2년 넘게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명단에 상주하면서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5백만부, 전세계적으로 5천만부 이상이 팔려 나가는 새로운 출판신화를 만들어낸 이 작품의 놀라운 인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분명 이 소설의 작품성이나 문학성 때문은 아니다. 작가의 일차원적 자기도취를 반영하는 캐릭터 묘사의 요소들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우선 작문의 수준만을 놓고 봐도 그 졸렬함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소설은 클리세(cliché : 진부한 표현) 투성이이며, 웬만한 대학 신입생 작문 세미나에서도 지적을 면할 수 없을 엉성한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어 번역판의 어색하고 무미한 문장들을 보고 단지 번역의 문제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원문에 나오는 다음의 문구들을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The female models were beautiful; he dated a few and fell partially in love with one before she moved to Paris and they drifted apart.
[여자 모델들은 아름다웠다. 그는 몇몇과 사귀고 한 사람과는 부분적으로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가 파리로 이사하면서 서로 멀어졌다.]
큼직한 활자로 2백 페이지도 채 못 되는 책에서, 예이츠를 좋아하고 틈틈이 소설도 쓴다는 남자주인공 로버트 킨케이드의 관점에서 여자 모델들을 떠올리며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그들이 그저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게으르거나 표현력이 모자람을 말해주는 것이다. (소설에는 이 밖에도 "The beer was cold," "She felt good," "He had nice lips" 라는 식의 사색이 전무한 문구가 널려 있다.) 또 위에서 "fell partially in love"는 여기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그대로 어감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부분적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일생에 한번뿐이라는 사랑의 이야기로 전세계 5천만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소설이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이렇게 무성의할 수 있단 말인가.그런가 하면, 월러는 때로 무언가 사랑의 신비로움 또는 천생연분 같은 것을 묘사한답시고 낯 뜨거울 정도로 과장된 표현과 수사학을 동원하기도 한다.
At last. At last. He had come so far…so far. And he lay upon her, perfectly formed and unalterably complete in his love for her. At last.
[마침내. 마침내. 그는 이렇게 멀리…이렇게 멀리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 대한 사랑 속에 완벽한 형태로 그리고 변할 수 없이 온전하게 그녀 위에 누워 있었다. 마침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소설은 이러한 너절한 문장의 총집합이다. 월러의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낯뜨거움은 바로 3류를 지향하는 로맨스소설 특유의 문체에서 얻어지는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5천만부 판매의 신화는 바로 이것으로 설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 놀라운 대중성은 이 소설이 몇 천만의 중독자를 이미 확보하고 있는 로맨스소설 장르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핵심적으로, 무료한 삶에 지쳐있는 한 여성의 '준비된 외도'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아마도 이 본질적으로 'bodice ripper'류의 소설들과 같은 DNA를 가진, 같은 독자층을 겨냥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월러의 이 3류 소설을 영화화 하면서 그 문체와 표현에서 철철 넘치는 민망한 대목들을 과감하게 재단했다. 그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같은 제목의 영화(1995)는 월러의 소설의 들뜨고 허술한 글에서 무언가 응어리지고 절박한 느낌을 주는 드라마를 추출해 냈다. 이스트우드는 '피셔 킹'(The Fisher King)의 시나리오를 쓴 리차드 라그레브니즈가 각색한 대본을 토대로, 두 주인공의 대사와 매디슨 카운티 농가의 풍경 묘사에 있어서 현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신경을 썼다. 또 소설에서는 황당할 정도로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사진작가 킨케이드(그는 자신이 '마지막 카우보이'라고 말한다)를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휴머니스트로 둔갑시켰다. 이스트우드가 사색 없는 넌센스를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감독이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맡은 프란체스카 역. 영화는 월러의 소설에서는 매력도 개성도 없는, 사실 스토리 설정상 킨케이드가 몰고 다니는 픽업트럭과 비등한 하나의 교통수단에 지나지 않는 듯 했던 이 여자 주인공을, 정체성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그 자의(自意)에 의한 선택이 그만큼 애처롭게 느껴지는 강한 캐릭터로 만들어 주었다. 스트립은 소품을 만지작거리거나 입가에서 머리카락을 쓸어내는 아주 작은 몸동작에서까지 한 여인의 처절한 심리를 담아내며 프란체스카의 캐릭터에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뉘앙스를 부여해 준다. 스트립의 장렬한 연기 하나만으로도 영화는 원작의 용렬함을 가뿐히 털어버리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수작이라고 부르기엔 소설의 원료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다. 닭살 오르는 대사를 아무리 추려냈다고 해도, 원작이 원작이니만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입에서 "I'm a citizen of the world"(난 세계의 시민입니다), "I love people. I'd like to meet 'em all"(난 사람을 무척 좋아합니다. 모두 다 만나고 싶어요) 따위의 맹랑한 말들이 삐죽삐죽 새어 나오곤 한다. 그리고 두 연인이 저녁 식탁에서 프란체스카가 남편을 떠나느니 마느니 머리를 맞대고 갑론을박하는 장면은 소설의 산문적인 지루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다.
어떤 면에서 로맨스소설의 정의는 "일상과는 동떨어진 남녀관계를 이상화한 소설"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소설이나 영화나, 떠돌이 사진작가와 권태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주부가 나눈 나흘간의 사랑을 극도로 이상화한다. 그들의 사랑은 다른 모든 사회적 책임이나 인간관계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다. 나흘간의 사랑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 카우보이'는 또 다른 모험을 찾아 훌쩍 떠나버리지만 여자는 황량한 가정생활로 다시 원대 복귀한다. 그것이 착한 일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이것이 여성들의 일반적인 판타지일수는 없겠거늘, 영화나 책을 본 수천만의 여성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남자의 입장에서든 여자의 입장에서든, 나흘간의 로맨스를 일평생 못 잊어 자신이 죽은 뒤 재를 '그때 그 강'에 뿌려달라고 한 이 사람들의 얘기가 그토록 감동적인가. 아무리 근본이나 뿌리에 비중을 두지 않고 사는 미국인들이라 해도, 그 소꿉장난에 정말로 마음이 움직이던가.
아무튼 의아하다. 아마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책으로 읽거나 영화로 본 사람은 1억 명이 넘지 않을까 싶은데, 로맨스소설의 기본 독자층을 백번 감안하더라도, 나는 이 스토리가 어떻게 그 엄청난 보편성을 띠게 됐는지를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사람들은, 현실의 삶과 사랑이 너무도 가혹하기에, 이 소설의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 허황된 스토리로 지성을 마취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많은 무리들이 3류 로맨스소설의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믿었던 것일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