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좀 더 정식명칭으로는 자희(慈禧)황후, 그리고 ‘孝欽慈禧端佑康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라는 어마어마한 공식명칭을 지닌 이 여성은 1835년 11월 29일에 태어났다.
영화에서 보았겠지만, 청나라 신하들은 황제 앞에서 축원을 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한다. 중국 발음으로는 ‘완쑤이, 완쑤이, 완완쑤이’가 된다. 오로지 황제에게 드리는 축원인데, 이 여성은 황제가 아니면서도 그런 축원을 받았으니 사실상의 황제였다.
이 여성은 만주족의‘에흐나라’ 종족 출신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한족 출신인데 가난 때문에 팔려가 만주족의 집안에 입양되었다는 제법 신빙성 있는 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니 생일이나 생시가 정확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그래서 그녀의 일생과 행적을 놓고 면밀히 검토해 보았더니 알려진 사주가 대단히 정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믿어도 좋다는 말씀이다.
일설에 의하면 미모가 뛰어난 그녀는 16세 때, 황제가 있는 황궁인 자금성에 궁녀로 들어갔는데 그 이전에 만주군 기병부대의 대장인 영록(榮祿)이란 남자와 잠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낭만적인 스토리이므로 홍콩영화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나온다.
당시의 황제는 함풍제였다. 그는 아편전쟁으로 고생한 도광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는데, 바로 그 해 무려 15년간이나 이어진 태평천국의 난-최근에는 혁명이라 불리는-이 발발했다. 그 무렵 조선은 철종을 옹립한 안동 김씨들이 세도정치를 농하고 있었다.
그럼 이 쯤에서 서태후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연 을미(乙未)
월 정해(丁亥)
일 을해(乙亥)
시 병자(丙子)
을목이 겨울에 났으니 당연히 불이 필요하고 또 토가 필요하다. 월과 시에 정화(丁火)와 병화(丙火)가 있으니 좋으며, 년지(年支)에 미토(未土)가 있으니 좋다. 훗날 운에서 따뜻한 기운을 만나면 크게 발전할 운명이다.
불이 있으니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수기가 원래 강하니 이런 운명은 성(性)적으로도 대단히 탁월한 소질을 지녔다. 물과 불의 조화(造化)가 있기 때문이다.
함풍제는 수많은 여인을 거느렸지만, 자녀를 본 것은 이 서태후 밖에 없었다. 그녀는 희박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눈에 들어 후사까지 이었으니 권력의 원천은 여기서 나온다.
그녀는 1852년 임자(壬子)년에 궁에 들어가 난(蘭)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함풍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난귀인(蘭貴人), 그러다가 1855년 을묘(乙卯)년에는 의빈(懿嬪)이란 이름을 받고 드디어 1856 병진(丙辰)년 4월에 가서 훗날의 동치제를 낳게 된다.
그녀가 황제의 눈에 띈 것이 임자년인데 이는 인수(印綬)의 운세이고, 집중적인 총애를 입기 시작한 것이 을묘년이다. 그녀의 일간(日干)이 을목(乙木)이니 알려진 사주가 정확하다는 것이다.
아들을 낳은 공로로 그녀는 1857년 정묘(丁卯)년에 의귀비(懿貴妃)로 승격했다. 그러나 그 뒤로 황제는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1861년 나이 서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였다. 그러자 동치제는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게 된다. 함풍제는 죽으면서 8명의 신하를 지명하여 어린 황제를 보필토록 했다. 일러서 고명대신(顧命大臣)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명대신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함풍제의 이복동생인 공친왕과 황실의 친척들은 두 명의 태후와 손잡고 바로 정변(政變)을 일으켜 두 태후의 수렴청정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사실상 공친왕과 두 태후의 공동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리하여 새 황제의 연호(年號)도 동치(同治), 즉 함께 다스린다는 뜻으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새 황제는 동치제가 되었다.
여기서 공친왕의 사주를 잠깐 보기로 하자.
연 임진(壬辰)
월 계축(癸丑)
일 계사(癸巳)
시 계축(癸丑)
사주 원국(元局)은 지나치게 차갑지만, 어려서부터 만나는 대운이 갑인(甲寅), 을묘(乙卯), 병진(丙辰), 정사(丁巳), 무오(戊午) 등 목(木)과 화(火)의 양지(陽地)로 향하니 크게 발전할 상이다. 공친왕은 함풍제의 이복동생으로서 재주가 뛰어나 함풍제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공친왕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 그 수습의 중임을 맡아 1860년 경신(庚申)년에 영국과 프랑스 등과 북경조약을 체결했다. 북경조약의 핵심은 청나라가 북경의 현관인 천진(天津)까지 해외에 개항했다는 점이며 이로서 중국의 개방은 대세로 굳어지고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재미난 점은 공친왕의 일간(日干)이 물이니 해외 세력의 협상 파트너를 했다는 점, 그리고 서태후가 을목(乙木)인데 계수는 을목을 생하므로 서태후가 권력을 잡는 데 있어 서로 이용 내지는 뜻이 맞았다는 점이다. 그 둘 간의 인연이 좋았던 셈이다.
두 명의 태후 중 동태후는 인품이 곱고 여성다웠던 인물로서 권력에 대한 추구가 없었기에 서태후와 공친왕의 절충에 의해 청 조정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침 1864년 갑자(甲子)년에 무려 십 수 년을 끌어온 태평천국의 반란이 끝나자 이를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 등의 유능한 인물들은 공친왕과 함께 서양의 힘을 십분 인식했기에 이른바 양무(洋務)운동을 이끌어 갔다.
여기서 잠깐 태평천국의 난으로 돌아가보자.
사건이 시작된 것은 1851년 신해(辛亥)년이다. 신해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1911년의 신해혁명이다.
봉건 중국은 바로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이라는 두 번의 혁명 거사를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정확하게 60년 간격이니 60년은 한 갑자(甲子)이고 언제나 역사는 한 갑자라는 기본 순환 주기를 통해 움직여간다.
홍수전에 의해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기독교가 지닌 평등사상에 착안하여 예수님을 홍수전은 형이라 하고, 하느님을 중국식으로 상제(上帝)라 하여 일어난 일종의 무산계급 혁명이다. 이것을 민란이라 하느냐 혁명이라 하느냐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난(亂)이라 하는 것은 어지러운 무엇이기에 그에 앞서 무언가 어지러움을 가져온 원인(遠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란은 기층의 불만에 의해 일어나기에 절로 어떤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민란이 지배층에 의해 진압되었다면 민란이고 그것에 의해 지배층이 전복되었다면 혁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가치(價値)의 문제를 제외하고 하는 얘기이다.
동시에 혁명은 언제나 그만으로서 혁명의 당초 목적을 달성하는 법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모든 혁명은 언제나 미완(未完)이라는 평가를 받기 마련인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 역시 처음에는 토지세 면제와 세금을 적게 하고 빈부의 격차를 줄인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기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었지만, 조직을 갖추게 되자 그 역시 지주층과의 타협이 불가피해졌고 그 바람에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기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평천국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기운은 이어져서 60년 뒤 또 다시 신해년에 가서 이른바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 조정은 종말을 고하게 되니 1911년의 혁명은 제2차 혁명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세상은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일시에 주는 법이 없다는 점이니 보다 유장(悠長)한 시각을 길러야 하는 필요성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잠시 태평천국 진압에 일등 공신인 증국번과 그 막료로서 성장한 이홍장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특히 이홍장은 구한말 우리 역사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증국번
연 신미(辛未)
월 기해(己亥)
일 병진(丙辰)
시 기해(己亥)
이홍장
연 계미(癸未)
월 갑인(甲寅)
일 을해(乙亥)
시 기묘(己卯)
이 두 사람은 공친왕의 지지를 업고 양무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특히 중국번은 원 이름이 자성(子城)이었으나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되겠다는 뜻의 ‘국번(國藩)’으로 개명할 정도로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의용군인 상군(湘軍)-호남성을 湘이라 한다-을 조직하는 한편 동문의 후배, 즉 문제(門弟)인 이홍장으로 하여금 회군(淮軍)을 조직토록 하여 고전 끝에 마침내 1864년 갑자(甲子)년에 가서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은 공친왕의 신임을 얻었고 서양의 힘, 이른바 견함리포(堅艦利砲), 풀어서 견고한 군함과 날카로운 대포의 위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힘과 기술을 도입하는 데 앞장서니 이것이 바로 양무운동이다.
후에 이홍장은 1870년 경오(庚午)년에 수도 북경 일대를 지키는 직예총독 및 서양 열강들과 교섭하는 북양통상사무대신(北洋通商事務大臣)으로 발탁되었는데, 마침 본격화된 일본의 조선 진출에 따른 갈등을 다루는 직접 당사자가 되었으니 우리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두 사람의 사주를 잠시 보면, 증국번은 기개(氣槪)가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고, 이홍장은 명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곡직인수(曲直仁壽)의 큰 인물임을 말해준다.
서태후의 섭정 아래, 공친왕은 증국번, 이홍장 등을 등용하여 서양 문물을 도입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며, 신식 군함과 병기를 제조하는 등 새 기운이 돌면서 다시 기세를 살리게 되니 이를 일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한다. 여기서 동치란 동치제의 연호를 따옴이다.
하지만 그 새 기운은 청나라로서 약동하는 봄의 기운이 아니라 늦가을의 그저 화려한 단풍놀이요, 쇠약한 병자가 일순 병세가 호전되는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했음을 훗날의 역사는 준엄하게 지적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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