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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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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마음

김민웅의 세상읽기 <69>

나무는 누가 뽑거나 옮기지 않는 한, 본래 시작했던 자리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게 제한된 범위의 생존의 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무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해내는 존재라는 느낌을 줍니다.

나무가 숨을 쉬면, 주변이 맑아집니다. 나무의 숨결은 우리의 호흡이 됩니다. 해서 나무가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를 질식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무가 태양을 마주하면 녹색의 풍경이 하늘과 땅에 그려집니다. 나무가 없는 도시는 그래서 천연색을 담은 광선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후천성 색맹이 되어갑니다.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면 흙은 부드러워집니다. 그렇지 못한 곳이 사막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나무가 뿌리박은 자리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 나무가 옷을 모두 벗고 홀로 서면, 땅은 벗은 옷을 거두어 땅 속 깊이 저장해두었다가 다시 나무에게 돌려주기도 하고, 다른 생명체의 기력을 위한 내공을 쌓아두기도 합니다.

나무는 자신을 온갖 생명체의 집으로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 그늘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열기를 식히는 쉼터가 됩니다. 그 가지는 다람쥐의 통로가 되고, 먼 길을 떠나온 철새들의 안락한 휴양처가 되곤 합니다. 오랜 나이를 먹고 난 이후에도, 패어진 줄기 속 공간은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한 것들의 은폐된 안전가옥(安全家屋)이 되기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나무는 산(山)의 다채로운 표정이며 도시의 문명수준이고, 강가의 파수꾼입니다. 나무는 계절의 시인이며, 때로 인생과 역사를 침묵으로 기록하는 사서(史書)이자 절망으로 고개가 밑으로만 밑으로만 떨구어질 때 문득 그 등걸에 기대어 하늘을 보게 하는 푯대입니다. 그 나무는, 땅속에 뻗어나간 뿌리 못지않게 공중에 생명의 핏줄을 펼친 기(氣)의 집결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좋아하는 이들은 그 마음과 영혼의 혈관이 세상을 향해 힘차게 펼쳐져 있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짧지만 의미가 깊은 이야기와 간결하고도 깨끗한 삽화로 사람들에게 풍성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나무와 소년이 세월을 거쳐 가면서 이루어내는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나무에게 남겨진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 나무의 사랑이 계속해서 새롭게 소년에게 주어지는 광경이 감사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와 함께, 훗날 우리 자신이 늙고 기운이 없어졌을 때에도 여전히 의지가 되는 존재가 있음을 일깨워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줍니다.

소년은 나무와 즐겁게 어울립니다. 나무를 타기도 하고 나무와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청년이 되자 소년시절의 나무와의 기억은 일상사와는 거리가 먼 현실이 됩니다. 그것이 나무는 슬펐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것을 하나하나 청년에게 주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과실을 주고, 자신의 가지를 주게 됩니다.

결국에는 중년이 넘은 소년에게 나무줄기 전체를 줍니다. 배를 만들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소년의 꿈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때마다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을 주는 일이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쩐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무 자신도 그 까닭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소년은 이제 더 이상 기력을 쓸 수 없는 초라한 노인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 때 나무는 말합니다. 너에게 더 이상 줄 것은 없지만, 그루터기만 남은 자신 위에 걸터앉으라고 말입니다. 지난 세월을 진정으로 깊이 이해하고, 사랑으로 그득한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나무는 그 노인이 된 소년에게 다가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무와 소년은 진정으로 행복해집니다.

뿌리 없이 이리 저리 바쁘게 부유(浮遊)했던 소년의 인생은, 대지에 뿌리를 깊게 박고 살아온 나무의 최후의 사랑으로 그동안의 생애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평화와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많은 것을 주고도 여전히 나무가 나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무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재는 아무리 아낌없이 주어도 결코 헐벗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풍요한 존재가 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비록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에 남습니다.

산에만 나무를 심을 일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그런 나무가 심겨지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사는 그렇게 해서 산림(山林)이 무성한, 놀랍기 그지없는 풍경으로 하루하루 변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 세상이 청정해질 것이며, 우리가 나이 들어 늙어도 세상은 기대어 쉴 곳이 있어 희망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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