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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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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3>

정조(正祖)와 수원성

조선(朝鮮)조의 역사에서 필자가 늘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러이 여기는 대목이 있었다. 임진왜란, 최근에 와서는 조일(朝日)전쟁이라 부르는 전쟁 당시, 선조 임금이 수도 한양을 지켜보려는 노력도 없이 그냥 북으로 내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또 병자호란에 가서도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蒙塵)하려다 실패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치욕을 당했다.

수도 한양성은 인구도 많고 북한산성과 함께 큰 성곽을 이루고 있었는데, 왜 한양을 지키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고 외적만 쳐들어오면 부랴부랴 도망가야 했을까 하는 것이 늘 궁금했었다. 그럴 바에야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길이 9995보에 성첩까지 높이 20 척, 대소 여덟 개의 성문을 지닌 한양성은 왜 쌓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상무 정신이 없어 임금 이하 모든 신하들이 유약해서 그랬던 것일까?

이것이 화두가 되어 조선 시대의 국방 정책에 관한 책과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최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즐겁게 시청하면서 앞의 주제와 국운(國運)의 흐름을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글을 써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나라의 수도를 내어주는 것 역시 다분히 문화적인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경우, 대부분 평야라서 난이 있거나 외적이 침입하면 일단 황제는 몽진이란 이름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다음, 전국에 널린 군대나 의병이 적을 물리치면 다시 환도하는 것이 상례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세가 험해서 주로 산성(山城)에 의지하여 지구전을 벌였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또한 모화(慕華)사상이 강해지다 보니 쉽게 수도를 내어주는 일이 반복되었던 감이 있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 성은 곧 생명이어서 끝까지 농성하는 것이 기본이고 마침내 농성이 어려우면 성주나 다이묘(大名)들은 일가와 함께 할복자살하곤 했다.

도요도미가 조선을 침공했을 때, 수도 한양을 점령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 조선 정벌은 마무리 단계로 들어서는구나 하고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으니 문화적 차이라는 것이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조가 쌓은 수원성은 결론적으로 조선 건국 이래 어떻게 하면 나라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좁게는 수도 한양에 대한 방어 전략에 대한 최종 답안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해답이었다.

정조가 수원성을 쌓은 이유로서 당시 왕권의 강화책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옳은 얘기이지만 왕권 강화책으로 왜 수원성 축조라는 사업을 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부족하다.

발단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英祖)가 도성사수론(都城死守論)을 국론으로 굳히면서 시작되었다. 도성사수론이란 국란이 일어나거나 외적의 침입 시에 과거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와 같이 임금이 무조건 수도 한양을 방기하고 몽진할 일이 아니라, 수도 한양을 백성들과 함께 지키겠다는 정책이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부끄러워하는 점에 대해 우리 선조들도 동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전쟁을 통해 모두 국방에 실패한 조선 왕조는 그 이후로도 별 신통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영조 18년, 즉 1742년 임술(壬戌)년이 되어서 강화성을 개축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다시 대두되었다. 대개의 신하들은 왜가 쳐들어오면 남한산성, 북쪽의 침입이 있으면 강화 섬으로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였다.

이에 영조는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가면 한양의 백성들은 모두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내가 어떻게 버리고 가겠는가?”하고 도성사수론을 제시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이 수도 한양의 성곽이 튼튼하지 못하고 또 지킬 곳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을 들어 도성을 지킨다는 방안에 반대했지만, 구성임(具聖任)이란 인물이 있어 도성을 지키는 16조의 방책을 통해 유사시에도 능히 도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 강화성 개축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은 영조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 때가 바로 1784년 갑자(甲子)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갑자년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과 국가를 대변하는 음양오행의 코드가 바로 갑자(甲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갑자의 해는 언제나 새로운 융성과 발전이 시작되는 해인데, 특히 120 년 간격으로 오는 갑자의 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반대로 갑오(甲午)라는 해가 오면 언제나 국력이 쇠하거나 해서 새로운 쇄신이 필요해진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도 갑오년이 되기 두 해 전의 일이었기에 국력이 피폐하고 정신이 유약해졌을 때였다.

1744년은 따라서 1984년 갑자년으로부터 240년 전이므로 중요한 해였다. 이 때 영조가 제시한 도성사수론은 훗날 정조가 수원성을 쌓는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구성임이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어 도성 한양을 보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국방정책과 체제, 편제 전체의 개편작업이 진행되면서 1747년 정묘(丁卯)년에는 수도절목(守都節目)이 간행되었고, 다시 확대 보완되어 1751년에는 수성책자(守城冊子)가 나오면서 완결을 보게 되었고 훈련법을 밝힌 수성기요(守城機要)도 발간 유포되었다.

수도절목은 국왕의 뜻을 받들어 일심협력하기 위한 9개조의 실행 사항이며, 수성책자는 이를 기반으로 유사시 도성의 백성들 각자가 군대와 협조해서 지켜야 할 구역을 정하고 이를 책자를 통해 널리 유포시켰으며, 아울러 수도 방위를 맡은 삼군문(三軍門)의 지역 분담, 각 백성들의 소속과 그에 따른 인원수를 정하고 있으며 수성기요란 도성방어를 위한 구체적인 훈련법을 담고 있다.

영조는 이를 통해 전에는 수도 방위에 있어 제외되던 양반까지 포함하였으며, 행주산성 당시의 사례를 통해 부녀자도 참여하는 만민동심(萬民同心)의 의지를 반포하였다. 이로써 당시 한양의 인구가 대략 20만이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인 10만을 유사시 수비 병력으로 하여 수도인 한양을 방어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도성사수론은 현실적으로 허점이 많았기에 반대론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그런 문제점은 영조를 이은 정조대에 가서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성을 쌓아 도성사수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했고, 그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쥐고자 했던 것이다.

수도 한양성은 방어할 범위가 너무 넓고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원성을 쌓아 오늘날 오산시의 독산산성과 호응해서 그물망과 같은 방어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멀리는 강화도를 통해 수도 한양의 뱃길을 보호하고 북으로는 북한산성을 통해 북쪽을 방어하는 태세를 갖춤으로써 당시 말로서 기각지세(掎角之勢), 즉 사슴의 다리를 잡는 한편 뿔을 잡아 사슴을 포획하는 일관된 방어 체제의 정점(頂点)으로써 건축된 수원성은 조선 땅 어디에도 여태껏 없었던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곽으로서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어진다.

이에 정조의 명을 받은 소장학자 다산 정약용은 우리의 성과 중국 그리고 유럽 성의 장단점들을 고려하여 성의 둘레와 높이 등 성벽의 규모와 성벽을 쌓을 재료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시도하였다.

산성과 평지성의 모습을 두루 갖춘 성벽의 총 둘레는 약 5.4㎞, 평균 높이 5m 정도이고 그 위에는 높이 1.2m 정도의 여장을 쌓았다. 여장은 모두 벽돌로 쌓고 여러 개의 총구를 뚫어놓았다.

성에는 네 군데 문을 내었으며, 성문에는 다시 밖으로 둥글게 겹으로 성벽을 쌓은 옹성을 쌓았다. 성문 외에 다섯 곳에 비밀출입구인 암문을 내었다. 한편 개천 위에는 각기 북수문과 남수문을 세웠다.

특히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요철형의 성벽을 놓고, 높은 위치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노대도 서쪽과 동쪽에 하나씩 두었다. 아울러 멀리 바깥을 보는 공심돈이라는 망루도 세 군데 만들었다.

아울러서 성벽을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치성을 여덟 군데, 군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건물로 된 포루를 다섯 군데, 대포를 쏘도록 만든 포구가 다섯 군데였다. 성의 서쪽과 동쪽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가 있어서 서장대, 동장대라 하였다. 성벽 모서리마다 사방을 내다볼 수 있는 누각인 각루도 다섯 군데 세웠다.

이 정도니 가히 이제껏 이처럼 많은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은 없었다고 하겠으며, 오랫동안 실학자들이 주장해온 벽돌도 전폭적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특기할 것은 완공 직후 공사 전말을 담은 ‘화성성역의궤’를 발간하여 당시 현장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공사의 모든 것을 오늘날에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의 국방정책은 건국 이래 국경선부터 방어한다는 관방(關防)론에서부터 산성(山城)방어론, 이어서 세종대의 행성(行城)론, 그러다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에 이르기까지 변천을 거듭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외침을 통해 허구가 드러나자 영조 대에 이르러 수도사수론이 제기되었고, 수원성은 유사시 수도사수를 위한 강력한 전략 거점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속에 오랜 고심과 연구가 결집된 총화였다고 하겠다.

수원성은 따라서 영조대에 수도사수론이 제기된 1744년, 갑자(甲子)년부터 시작하여 수원성이 착공된 1794년 갑인(甲寅)년, 낙성 1796년 병진(丙辰)년에 이르는 50여년간에 걸친 조선 시대 국운의 마지막 흥륭기에 있었던 커다란 역사(役事)였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실로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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