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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일본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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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일본의 늪

김민웅의 세상읽기 <62>

일본사람을 개개인으로 만나보면 대체로 수줍어하고 겸손하며 깍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집단으로 대할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개인 일본인과는 매우 다른 야만적 기세를 뿜어냅니다. 아시아는 지난 19세기 이래 이러한 이중적 일본과 마주치면서 막심한 고통과 혼란을 겪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렇게 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본심(本心)을 감추고, 뒤에서 칼을 뽑아들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친절한 표정을 믿었던 이들은 충격과 함께 대응의 순발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16세기 이래 막부(幕府)정치의 무서운 힘 앞에서 숨죽이며 미소로 자신을 은폐하다가 기회를 잡으면 그대로 치고 들어가는 살벌한 파벌싸움의 유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하여 일본의 이른바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막부정치의 결산과 이후 이어지는 명치유신의 정치적 선택의 내용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했던 원흉으로 지목된 이토 히로부미 즉,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일본인들에게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그는 일본의 입헌체제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일본의 역사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등박문을 비롯한 당대의 일본 지도자들이 밀고 나갔던 근대화전략은 기본적으로 천황의 이름으로 전개하는 제국주의 국가 체제 완비였습니다. 이에는 이등박문이 주도한 제국헌법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일본역사가 입헌제의 출발로 칭송하고 있는 이른바 제국헌법은 천황제의 정통성을 정식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입헌제는 근본적으로 천황제에 그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소위 국체의 핵심이 됩니다.

1925년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공포하고 일본의 국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논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했습니다. 그 국체의 중심에는 천황제가 있다는 점에서 국체 논란과 헌법 비판은 천황에 대한 비판으로 직결되기에 양심적인 지식인들조차 입을 열기를 꺼려했습니다.

다행히도 1898년 제국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이에 대하여 포문을 열었던 일본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기타 잇키(北一輝)”같은 인물은 “2천5백년 동안 황실을 받들어왔던 일본역사의 서술과 결론은 분명하게 허위이다”라고 일격을 날렸습니다. 이에 더하여 일본역사가 그 기초로 삼고 있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신도(神道)를 믿는 미신에 불과한 기록이라고 강력하게 힐난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억압하면서 이 천황제를 중심에 세워,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그를 수행하는 이른바 국체를 신성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시민적 자유를 가진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이 천황의 통치를 종교적 차원의 절대성을 가지고 떠받들어야 하는 신민(臣民)으로 만들어지고 만 것입니다.

제국헌법을 국민적 차원에서 세뇌하기 위해 교육칙어가 생겼고 이는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序詞)로 암송이 강제되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누군가가 비판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배제되고 사고의 수준을 기본적으로 결정해버리게 되면, 그 사회와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자주적 사고의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일본사회가 전후(戰後) 오늘날까지 시민사회적 역량을 민주주의 운동으로 발전시켜오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얌전한 개인으로 길러진 것에도 이 신민, 즉 천황의 통치에 무릎을 꿇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 사연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의 지배자들이 패전 후 천황제만큼은 고수하려 했던 이유도 이 천황제를 중심으로 다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복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일본 왕, 즉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화했고 강제징용과 강제징병을 했고 아시아를 전쟁의 참화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 천황은 전범으로 처단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일본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아직도 성역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본이니 자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며, 언제든 또다시 천황의 이름으로 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야욕을 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비밀은 바로 이 천황제에 있습니다. 이를 해체하지 않으면 아시아의 평화는 요원해집니다. 천황제를 정당화한 제국헌법의 망령이 일본 사회의 정치 문화 곳곳에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일본은 “아시아의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황제는 일본의 건강한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자멸의 늪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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