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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보내기

김민웅의 세상읽기 <61>

조선조 선조 때, 허난설헌의 둘째 오빠와 친구사이로 허난설헌에게 시문(詩文)을 지도했던 바 있는 이달(李達)이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시 <산사(山寺)>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절간이 흰 구름에 묻혀 있어도/흰 구름 스님들은 쓸지를 않네” 원문으로 읽자면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라고 되어 있는데 깊은 산 고적한 곳에 훌쩍 들어선 조용한 사찰 하나가 구름에 쌓여 있는 풍치가 눈앞에 신비롭게 드러나는 듯 합니다. 스님들이 이 흰 구름을 쓸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는 이달의 표현은 그야말로 이 시에 담겨진 아름다움을 절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 속의 사찰이 자신을 휘감고 있는 흰 구름을 걷어치우고 저를 드러내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구름과 하나가 되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자신의 모습을 이루어내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주목하게 됩니다. 흔히 아침이 밝으면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정신수련의 한 과정인 양 마당을 열심히 쓰는 수도자들이 얼핏 이 백운(白雲)에 덮인 절간의 처지를 그대로 둘 것 같지 않은데, 시인의 눈은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답게 되는 것은 그저 자신 홀로 되는 일이 아니라 그와 어울리는 풍경과 기운과 사람들로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호흡해나갈 때 비로소 빛나게 이루어지는 축복이지 않나 싶습니다. 시인 이달이 그린 산사의 풍치도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소박한 화폭처럼 담겨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겨울은 유독 눈이 잘 오지 않는 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만, 역시 겨울의 운치는 눈과 분리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 김광균의 시<설야(雪夜)> 즉, “눈 내리는 밤”은 겨울 풍경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합니다.

“어느 머언 곳의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처마 끝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서글픈 옛 자취인양 흰 눈이 나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이 시는 그 전문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유독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구절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건 그저 어딘가에서 슬며시 그리고 은밀하게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서 어떤 그리움이 있는 것인지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겠지요. 설야(雪夜)의 깊고 깊은 밤에 나누는 “운우(雲雨)의 정(情)”이 그에게 문뜩 사무쳤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건 육신의 색정이 아니라. 몸과 혼의 그윽한 기쁨에 대한 소망이라 여겨집니다.

어쨌건, 눈은 땅위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함께 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지난 시간의 흔적이 서려 있는 머언 곳의 소식이기도 하고 잠시 어디에선가 놓아버린 기억의 조각이기도 하며 아니면 홀로 내 영혼에 고독하게 강림하는 위로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눈이 내리는 밤길을 걷는다면, 아마도 가로등에 스치는 눈발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듯 합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은 그런 풍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생의 순간을 그 영혼에 새겨놓게 될 수도 있겠지요.

이런 글 언젠가 남겨 보았습니다. <눈 길>이라는 시의 한 대목입니다. “새벽이 오기 전/산마루 넘을지?/밤에 보는 임 더욱 고운데//쌓이는 눈 속에 행여 더는 못갈까,/길을 내는 마음이/발걸음 재촉하며/어느새 자취 없이 저만치 가고 있다” 눈 속에 파묻혀 그리운 이에게 더는 가지 못할까 하여 마음이 바쁜 것입니다. 길은 결국 마음이 내는 것이니 눈이 내린다 한들 길이 막히겠습니까만은 말입니다.

이제 겨울은 점점 물러서려 합니다. 아쉬운 마음에 그 손을 잡아 뿌리치지 못하게 하고 싶지만, 어디 그것이 사람의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그러나 소중한 풍경 하나 우리 마음에 만들고 떠나보낸다면, 정겨운 기억이 우리를 어떤 밤이 찾아와도 고독하지 않게 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겨울나기, 이 계절의 선물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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