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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김민웅의 세상읽기 <59>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새겨진 A. 그것은 "간통"을 뜻하는 영어 "Adultery" 의 머리글자로 그녀의 삶에 지울 수 없이 남겨진 낙인이었습니다. 혼외정사로 인한 딸아이 펄까지 태어난 그녀에게, 1640년대 중반 미국 보스턴의 청교도적 심판의 화살이 겨누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자백과 은페의 갈등을 겪고 있던 딤즈데일. 그는 이 마을의 종교지도자였고, 프린과 사랑을 나눈 당사자였습니다. 헤스터의 남편 틸링워스는 자신의 아내가 상대한 자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적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딤즈데일의 존재를 파악하게 됩니다.

마침내 딤즈데일은 이 모든 사건의 진상을 마을 전체에 공개하고 헤스터 프린이 감당하고 있던 무겁고도 무거운 사회의 낙인의 무게를 자신이 온통 지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있던 A도 딤즈데일의 가슴에 있었고, 그것은 점차 사람들에게 Adultery의 A가 아닌, 능력을 의미하는 Able의 A 또는 천사 Angel의 A라는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건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지점이었습니다.

17세기 보스턴의 고도로 종교화된 공동체 안에서 인간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나다나엘 호오돈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의 대강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질식할 것 같은 청교도적 윤리의 굴레에 묶인 삶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사랑에 진정한 생명을 걸고, 그에 대해 존재 전체의 책임을 진 사람들의 극적 고뇌와 갈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전하고 있는 맥락과 의미는 당대에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논란의 충격이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랑과 관련된 인간의 선택을 다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의 신성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단죄는 당연히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사랑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낙인을 피하고 부인하거나 또는 평생의 짐과 상처로 받아들이면서 존재 없는 자처럼 살아가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것임을 내세운 딤즈데일의 용기에 나다나엘 호오돈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대목입니다. 칼빈주의적 청교도 윤리가 인간 개인의 내면에 있는 마음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그대로 억압하거나 죄로 규정해버리는 것에 대한 반격이 이로써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딤즈데일이 그저 평범한 남성이었다면 모르겠거니와 이 지역의 뛰어난 종교 지도자이자 놀라운 능력을 가진 대설교가였고, 따라서 그가 청교도적 윤리관의 대변자이자 수호자의 상징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더더욱 충격이 됩니다. 공동체 전체의 최후의 종교적 보루가 이로써 허물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홍글씨>로 정죄된 헤스터 프린의 사랑은 이 사건의 현장인 보스턴의 마을 사람 전체의 가슴에 종교적 교리를 방패삼아 은폐되어 있으나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마음의 진상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모두가 가슴 깊은 한 구석에서는 알게 모르게 갈구하고 있던 진정한 사랑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 열망을 현실에서 성취하고 싶은 억눌린 용기, 그것을 헤스터 프린과 딤즈데일은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거의 무방비하게 열려있는 성 시장의 현실에서 <주홍글씨>의 절박하고 진실했던 사랑의 면모는 볼 수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기존윤리의 벽을 넘어서려 했던 이들이 아니라, 육체적 욕망과 재물의 탐욕이 서로 결합하면서 현실은 추악해져가고 있습니다. 사랑과 윤리의 논쟁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비극이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주홍글씨>는 기묘한 삼각관계와 동성애까지 포함된 채, 삭막한 육신의 향연에 취해버린 이들의 절망과 그 파멸을 보여줍니다. 내용의 질적 수준과 흥행 모두에서 실패해버렸지만, 그것은 오늘날 성애(性愛)가 직면한 막다른 골목을 드러낸 경우였습니다. 그 영화에 출연했던, 적지 않은 이들이 사랑했던 한 여배우가 자살로 자신의 인생에 막을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가슴에 어떤 멍에와 낙인을 안고 있었기에 그렇게 가고 만 것일까요?

수많은 유무형의 주홍글씨가 사람들의 삶을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일 수도 있고 경제일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와 문화, 그리고 교육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방적 단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진실하게 외쳐지는 사랑과 생명에 대한 갈구의 소리를 듣는 일일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데 실패해 버리는 사회는 생명의 길목이 가로막힌 지점에 서 있는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린,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일까요?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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