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은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회상에 잠겼다. 자못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퍽이나 쓸쓸해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백범 김구도 침묵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몽양과 즐거운 농담을 늘 주고받던 장준하도 오늘만큼은 역시 다소 우울해보였다.
몽양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백범 형님, 우리들이 흘린 피가 아직도 이 백성에게 큰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있는가 봅니다.”
백범은 무거운 숨을 들이키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준하는 이 두 거인 같은 지도자들의 선문답같이 오고가는 눈빛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조국의 앞날에 대한 고뇌를 함께 읽어 내렸다.
사실 이 세 사람 모두 그 죽음에 얽힌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고, 역사는 뚜렷한 진상을 모르는 채 여기까지 오고 말았지 아니한가?
아, 돌아보면 얼마의 세월이었던가? 백주의 대로에서 그가 흉탄에 쓰러져 이렇게 이승의 세계로 거처를 옮긴 지 근 60년에 이른 이 때에 몽양은 자신이 독립운동가로 서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자신은 2급 독립 운동가로 역사의 위상이 정리되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에 자신에 대한 후세대의 인식과 평가는 아직도 이 지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몽양은 자신을 2급이니 1급이니 하고 논란을 벌이는 것에도 마음이 상했다거나, 또는 해방 60년의 시점에서야 비로소 이렇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공식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것도 불만이 아니었다. 몽양이 그 정도의 그릇은 당연히 아니었다.
정작 그가 이 소식을 들으면서 외로움과 아픔을 느꼈던 까닭은 다른 것에 있었다. 그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후대들의 인식과 평가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서서 민족이 처한 현실이었다. 반쪽짜리로 남아서 상대를 제대로 그리고 진정으로 알려 들지도 않고 있는 마음의 현실, 그것을 몽양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가 진척을 보지 못했던 그 근원에도 이 <닫힌 마음>의 굳건한 족쇄가 존재하고 있는 바였다.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이 흔들리고 있던 19세기말엽인 1886년에 태어나, 파란 많은 세월과 굽이치는 격동의 고비를 넘어 해방의 환희를 맛보기까지 몽양은 오직 하나, 찢기고 밟히고 갈라진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아름답고 의로운 나라를 일구어 내는 일이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그가 일본의 초청을 거부하지 않고 일본을 방문, 일본의 조선강점이 세계평화에 어떤 파괴적 현실을 만들어 냈는가를 막힘없는 논리로 토로하자 일인들은 이를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조선의 한 위대한 인물을 본 경이로움에 머리를 숙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해방정국에서 혼란을 수습할 최적의 인물로 몽양이 지목된 것은 당대의 순리였고, 그는 좌와 우로 나누어진 현실을 양자간의 합작을 토대로 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몽양이 쓰러진 자리에서 발길을 옮긴 것이 바로 백범이었다. 분단의 미래가 보이자 백범은 결연히 좌와 우가 하나 되는 통일정부 수립의 길을 간다. 그가 또한 쓰러지자 이번에는 장준하가 그 뒤를 이었다. 그 역시 그를 겨냥한 폭력으로 더 이상 현실의 역사에서 발길을 옳길 수 없었다.
백범이 입을 열었다.
“몽양, 너무 괴로워하지 말게나. 이러면서 하나하나 문을 열어나가지 않겠는가?”
장준하도 거들었다.
“몽양 선생님, 백범 선생님 말씀에 일리가 있으십니다. 힘을 내시지요.”
여운형이 이 두 사람의 말에 빙긋 웃었다. 자신만이 민족과 역사를 생각한다고 잠시 여긴 것은 아닌지 하고 좀 부끄러워졌고,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듬뿍 담긴 격려가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몽양이 부드럽게 화답했다.
“그래요, 해방 60주년, 새롭게 시작해야지요. 우리의 간절한 염원, 지상의 우리 후손들이 이러면서 알아가 주리라 믿습니다.” 말을 마친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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