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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징의 논리"와 사형제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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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징의 논리"와 사형제도 논란

김민웅의 세상읽기 <57>

<작은 것들의 신(God of the small things)>이라는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문학에서 사회변혁의 자리로 자신의 중심을 옮긴 인도 여성입니다. 현실은 인간에게 치열하게 상처를 입히고 그 삶을 파괴하고 있는데, 문학만으로 세상에 대한 힘 있는 발언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긴 그녀는 오늘날 “제국의 거대한 폭력체계”와 맞서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첫 소설 제목처럼, 세상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순결성을 최선으로 발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난한 유년시절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인도의 주류에 속하게 된 아룬다티 로이는 자신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 획득한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발언의 영역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아룬다티 로이가 쓴 <전쟁의 담론(War Talk)>은 인간이 겉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 모순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본래 표방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에 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기만에 대한 폭로입니다.

가령, 인도와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종교적 영토적 분쟁으로 적대관계를 이루어 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희생되어 왔습니다. 아룬다티는 힌두교와 이슬람 간의 격돌 속에서 이들이 서로 자신들의 종교적 상징과 교리, 그리고 신적 존재를 내세워 상대를 살해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포장만 다를 뿐이지 “같은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둘 다 자신의 주장이나 교리 또는 원칙을 위해서라면 인간을 쉽사리 희생시켜도 된다는 “잔혹한 신”을 섬기는 자들이며, 따라서 이들 간의 이름이 다르거나 종교적 소속에 차이가 나는 것은 하찮은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힌두교 신자도 아니고 믿음이 깊은 이슬람교도도 아닌, “살인(殺人)의 힘”을 믿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로 영혼의 능력에 대한 깊고 깊은 관심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할 종교가 물리적 폭력을 근거로 인간과 세상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하니 이야말로 자신의 종교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룬다티 로이가, 이들 폭력을 앞세우는 자들은 힌두교도도 이슬람교도도 결코 아니라고 단정 지은 것은 전혀 틀리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그 살인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응징의 논리”에서 태어나는 행위인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응징에 대한 정당성이 절대적으로 부여되는 순간, 그 응징의 수단조차 절대적인 정당성을 얻기 쉽습니다. 가히 종교적 교조주의의 출현입니다.

이에 기초한 이른바 근본주의적 종교투쟁이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가볍게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기인합니다. 자신을 절대적 선으로 놓고, 상대를 절대적 악으로 규정하는 근본주의적 사고는 그 앞에 어떤 이름이 붙든간에 관계없이 “폭력의 신”을 믿는 과격한 사제를 만들어내고 말 수 있습니다.

인도인인 그녀가 일부 자국인들로부터 파키스탄 인들의 행위에 복수하지 않는 “반민족분자”라고 지목받고 있는 이유도 이 죽음의 힘에 지배받고 있는 응징의 논리에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쪽에서는 목숨을 겨냥하고라도 응징하지 않으면 평화가 없다고 믿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럴수록 평화는 사멸하고 만다고 봅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놓고 응징을 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은 제대로 답을 얻고 있는지 자문(自問)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들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본질적으로 보자면 전쟁이라는 야만은 결국 인간의 생명을 겨냥한 응징의 논리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형 제도를 강력하게 신봉하는 체제는 전쟁의 논리에 쉽게 말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미국 남부지역이 미국의 전쟁정책에 가장 열정적 지지 세력인 것은 하등 이상하지 않은 까닭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형제도의 철폐는 우리 사회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격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응징, 죽음, 전쟁의 담론이 아닌, 용서, 생명, 평화의 담론이 그로써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거대한 것들로부터 상처받고 사는 작은 자들의 믿음은, 신이 자신들의 편에 서주는 것입니다. 그건, 생명이 승리하는 세상이 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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