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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룻배와 행인, 그리고 시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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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룻배와 행인, 그리고 시간의 얼굴

김민웅의 세상읽기 <56>

겨울이 서서히 봄에게 자리를 내줄 채비를 차리는 것 같습니다. 칼바람처럼 몰아쳤던 삭풍(朔風)도 무디어지고 기세등등했던 혹한의 기운도 물러서는 듯합니다. 시간의 흐름이란 이렇게 어김없는 발자국을 남기고 다음의 고개를 넘어 가는 뒷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웅하는 이 아무도 없는 쓸쓸한 떠남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기약을 전해주고 가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계절을 충만하게 채우고, 미련 없이 일어설 때와 자리를 아는 지혜가 넉넉한 존재를 닮은 자화상(自畵像)을 보는 느낌입니다.

겨울은 얼핏 침묵하는 듯하나 사실은 발언의 내공을 쌓아가는 시간이며, 모든 것이 자취 없이 사그러 드는 때인 것 같으나 사실은 새롭게 움트는 비밀을 간직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겨울은 표정이 깊어집니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느새 영혼의 무게를 더하는 시간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하여 사라지는 것과 새로 태어나는 것들에 대한 "성찰의 미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얼어있는 땅 속의 소리를 듣게 하는 힘을 기르게 하며, 산맥을 타고 흐르는 찬 이슬의 빛깔을 발견하는 기쁨을 배우게 합니다. 그건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하는 기쁨입니다. 덮여 있다고 아예 묻혀버린 것이 아니며, 실낱같다고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끊임없이 유전(流轉)하고, 그 흐름의 궤적은 그 순간마다의 의미를 탄생시킵니다. 다 이루고 나서야 또는 그 끝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각성하게 되는 수도 있지만, “순간의 뜻”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절감하게 된다면 우리 인생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납니다.

한용운 선생의 시 가운데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 않고 가십니다 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

시간은 어쩌면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실어날아 주는 나룻배와 같고, 우리는 그 배에 실려 가는 행인인 듯 합니다.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나면, 우리를 태우고 그곳까지 간 나룻배를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에 바빠 터벅 터벅 가버리고 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은 우리를 안고, 깊으나 얕으나 또는 급한 여울이나 가리지 않고 건너갑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미래의 시간조차 우리를 기다리면서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시간과 언젠가는 기어코 만날 줄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 만남의 순간들은 모두 우리 인생에 기록되는 세월의 가락이요, 잊혀질 수 없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혹 현실의 나룻배는 날마다 날마다 낡아갈지 모르나, 우리 마음의 나룻배는 오래 되었다고 낡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행로를 새롭게 갈 때마다 그 나룻배 안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기대와 희망 그리고 의지와 용기가 솟아난다면 말입니다.

겨울이 우리를 뒤돌아 볼 때, 우린 새로운 나룻배를 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지금까지 우리를 안고 강을 건너온 나룻배를 향해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넘어서야 하는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그 때마다 주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계절의 골목에 서서 정작 어떤 순간의 무엇을 기억하며 새로운 배를 타고 떠나야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성실하게 묻는 인생에게 기쁨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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