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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와 빼앗길 수 없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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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와 빼앗길 수 없는 목소리

김민웅의 세상읽기 <55>

바다 속 궁전에는 다섯 명의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다섯 살이 되면 그 때부터는 바다 위로 몸을 드러내고 지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건 이들 바다 소녀들에게 가슴을 뛰게 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지나가는 배를 보기도 하고 육지의 숲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도 지켜보며, 하늘의 별과 구름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때로 폭풍이 몰아치면, 이를 선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래로 신호를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선원들은 이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곡조의 소리가 폭풍을 불러온다고 여기고 두려워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다와 지상의 세계는 서로 맞닿아 있었지만, 그러나 엄연한 경계선이 있었고 이 두 세계 사이에 통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상의 사람들은 바다 속에 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 바다 소녀들이 지상의 인간들과 소통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멋진 청년을 발견했어도 이들 바다 소녀들은 그에게 다가갈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드디어 열다섯이 된 막내 공주가 지상의 세계를 구경하고 돌아올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다리는 그 어느 물고기보다 아름다운 비늘도 덮여 있었고 파도를 가르고 아름답고 힘차게 유영하는 모습은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매혹적이어서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녀가 바다 위로 몸을 드러내고 지상의 세계를 구경하고 있을 때, 마침 배 한척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선상(船上)은 어느 멋진 왕자님의 생일잔치로 들떠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늘 저쪽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배는 결국 두 동강이가 났고 왕자님은 파도에 실려 표류하기 시작했는데 바다 소녀는 그 왕자님을 껴안고 육지의 모래사장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그녀는 왕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는데 육지 저편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만 몸을 숨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눈을 떴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떤 한 처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바다 소녀는 왕자가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줄 것을 기다렸다가 그만 사태가 이렇게 되고 만 것에 실망하고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내내 왕자님 생각뿐이었고, 결국 지상의 인간이 되어 왕자와 만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내어주고 사람의 다리를 얻게 됩니다.

이 <인어공주>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 안데르센의 원작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지만, 인어에게는 죽으면 그저 바다의 물거품이 될 뿐이다. 그냥 인어로 살면 300년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만일 이 바다 소녀가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영혼을 가진 인간이 아닌, 그 순간의 물거품으로 변한다”고 말입니다.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인어공주는 행복한 결말로 맺어지지만, 원작은 자신을 구해준 인어공주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 왕자가 다른 공주와 결혼을 해버리는 바람에 인어공주는 물거품 대신 공기방울로 변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바다 소녀는 지상에서 벙어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결국 자신의 고향인 바다가 아닌 하늘을 떠다니는 슬픈 영혼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바다를 떠나 지상의 세계에서 사랑으로 안착하려는 바다 소녀의 꿈은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유영하던 유년기를 벗어나 자신의 다리로 땅을 딛고 서려는 인간의 모든 존재적 발전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바다 소녀는 걸을 때마다 발이 칼 위를 딛고 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데, 그건 그만큼 성장의 진통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를 잃어버린 소녀는 자신이 왕자를 구했다는 비밀을 전하지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사랑을 노래할 목소리는 바다소녀의 영혼을 태어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힘이었는데 그걸 그만 마녀의 요구에 넘겨주고 말았으니 두 다리를 얻었다 해도 그건 불완전한 선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난 세월 우리는 역사의 유년기에서 성장의 고통을 겪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의 진정한 목소리는 혹 잃어버리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합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육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힘찬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민족에 대한 자신의 사랑,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진솔한 표현을 하지 못하고 만다면 그건 지극한 희생을 치르고도 그만 영혼을 갖지 못한 물거품이나 공기방울로 변해버리고 만 인어공주의 슬픔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만의 목소리가 있는 것이 분명할 텐데 말입니다. 혹 거대한 폭풍이 몰아쳐 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를 알리는 노래조차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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