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68세대의 맹장 가운데 하나였던 “폴커 루드비히(Volker Ludwig)”의 원작을 김민기가 번안, 연출해서 10년이 넘게 대학로 “학전”에서 공연해오고 있는 <지하철 1호선>. “락 뮤지칼(Rock Musical)”이라고 붙여진 이 작품은 지난 세월의 변화만큼 그 내용과 형식도 다르게 접근되고 재해석되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혁명의 회오리에서 민중을 껴안고 성장해왔던 세대와, 자본의 위력 앞에서 시장의 유혹을 당연한 일상으로 알고 살아온 세대 간에는 얼핏 서로 대화의 통로가 존재하지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감 있는 풍자와 기습적인 해학이 뒤엉켜 우리를 새삼 돌아보게 할 때, 세대간의 격차는 슬며시 무너지고 맙니다. 그리고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에 대한 질문을 향해 서로 마주 보게 하는 듯 합니다.
연변 조선족 “선녀”의 눈을 통해 본 서울의 밑바닥 지하군상(地下群像)들은 그 누구 하나 제대로 몸을 세워 걷는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비틀거리거나 휘청거리든지 아니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운 출구가 열리지 않고, 못난 자들은 그냥 그렇게 못나게 살다가 가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 가운데 그나마 유일하게 몸을 바로 잡고 있는 이는 선녀 하나뿐이었습니다. 조선족 처녀의 독특한 발음과 순진한 눈길로 드러나는 하류인생들의 아픔과 고독, 해답 없는 쟁투, 그리고 상류층 또는 지도층들의 기만과 위선은 그런데 과거의 기록화(記錄畵)로만 남지 않습니다. <지하철 1호선>의 시점으로 잡혀져 있는 1998년을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에게 여전히 던져지고 있는 질문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변 조선족은 우리의 자본주의적 탐욕과 오만으로 이렇게 저렇게 망가뜨려 놓은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역사의 향수”가 어린 지점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갈망하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능멸해버린 자리에 서 있는 “상처 난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005년의 현실에서 연변 조선족 처녀 선녀의 등장은 이미 낡아버린 상투성과 깨어진 꿈의 초라한 반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의 선녀는 이제 현실성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신선한 매력도 이전처럼 더 이상 뿜어내지 못한다고 생각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선녀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기도 모르는 새에 깊어진 타락에서 연유하는 결론일 뿐입니다.
자신을 농락한 제비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순정 하나만 믿고 서울에 온 선녀는 혼돈과 증오, 오만과 병적 열등감, 그리고 속임수가 범벅된 지하인생의 탁류를 온유하게 품어내는 존재로 남습니다. 그건 일종의 어설픈 신화일 수도 있고 또한 그나마 끝까지 붙잡고 싶은 사라져가는 낭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혁명의 세대가 기대고 있던 아스라한 설화(說話)와 자본의 세대가 추구하는 욕망 사이에 힘겹게 자신을 지키고 있는 안타까운 미담(美談)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변 처녀가,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한 청년의 손을 잡고 이제 곧 끊기는 지하철 1호선 막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은 극적 필연성의 문제나 충분한 논리적 설득력과 관련한 비평적 논란을 넘어서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건 아픈 자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요,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는 마음일 것입니다.
80년대 질풍노도의 현실 앞에서, 그의 노래가 투쟁적 선명성이 결여되었다는 일부 노래패들의 공격을 받았던 김민기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노라고 말합니다. “증오를 밑바닥에 깔고 있는 노래를 부르는 이의 영혼은 역시 증오로 채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세월이 지나 잊혀지고 만 노래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잔잔하게 채우는 힘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고단했던 하루의 끝”에서 결국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를 공격적으로 추궁하는 현실로부터 섬세하게 방어해주는 넉넉한 안식과 그리고 다시 새롭게 살 수 있는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사랑과 격려일 겁니다. 그래서 인생의 출구는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끝인가 할 때 어떻게든 막차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주저함 없이 함께 손을 잡고 달려가 주는 마음과 만나는 감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자세를 바로 하여 기쁘게 걷는 자신을 스스로 발견하게 될 겁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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