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그 때 그 사람, 그리고 흐르는 강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그 때 그 사람, 그리고 흐르는 강

김민웅의 세상읽기 <51>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한 고대 희랍 철학자의 말은 시간의 유전(流轉)과 함께 만물의 변화를 일깨우는 성찰입니다. 강은 그 강 그대로이지만 그 강의 내면을 흐르는 사연들은 모두 다르고, 따라서 오늘의 강은 어제의 강과는 또한 다른 강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 현재를 규정해버리거나 또는 현재로 과거를 인위적으로 인식하지 말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움직임, 그 변화의 경로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통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진실에 대한 정직함을 배우는 훈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철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일갈하셨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 그것은 산을 산 아닌 다른 것으로 보려 하거나 물을 물 아닌 다른 것으로 보려 할 때 벌어지는 인간사의 온갖 탐욕과 죄에 대한 경각심의 촉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진면목에 대한 이해와 직시가 없게 되면 결국 자기가 중심이 되서 대상을 난도질하게 되기 쉽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거나 보지 못한 사이에 진행하고 있는 흐름을 없는 것으로, 또는 이상한 것으로 낙인찍게 됩니다. 정작 이상한 것은 바로 그렇게 하는 자신인데도 말입니다.

어제 타계한 시인 이기형의 시 ‘낙화’는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때,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안다’ 는 것은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일어난 단상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만물의 변화가 지향해 가는 지점에 대한 지혜를 뜻합니다. 결국 “아름다운 자”는 이 지혜를 터득 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일을 알지 못해서 지금까지의 영광을 스스로 수치와 불명예로 바꾸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는 시인은 이렇게 그 낙화의 의미를 통찰합니다. “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 않아 열매맺는/가을을 향해” 그것은 어디론가 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그저 떨어지는 꽃잎처럼 보이지만 그 꽃잎이 가는 길의 다음 목적지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떨어지는 꽃잎이 서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열리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멈추어 서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언제나 진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반동의 시기라는 것이 있어서 때론 뒤로 후퇴를 강요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시기는 그리 길지 못합니다. 결국 가야 할 길은 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내야 할 것은 보내야 강은 흐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은 고여 썩게 됩니다. 또한, 뒤에 오는 것으로 인해 강은 범람하고 맙니다. 시들어야 할 것이 시들어야 피어날 것이 피어납니다. 독초가 무성하면 꽃은 숨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면 산은 자칫 입산금지의 영토가 되고 맙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들, 그 때 그 이들과 관련된 영화를 놓고 벌인 가위질이 문화계를 분노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실 여부를 비롯하여 지난 시기의 역사 해석을 둘러싸고 정치사회적 파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소재로 한 문화 창작품은 그 자체의 가치를 지켜 줘야 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는 자신이 이미 발을 담근 강물이 아직도 똑같이 흐르고 있다고 여기는, 아니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 강은 사실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뒤에서 오는 강물을 손으로 막으려 듭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런 그는 물쌀에 휩싸여 떠내려 가게 되는 것을 모르는가 봅니다.

한 때 아무리 영광을 누렸다고 해도 꽃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어야 자신이 계속 여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뒷모습은 아름답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그건 그 “꽃”에도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역사도 언젠가는 “그 때 그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