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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체의 망치 그리고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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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체의 망치 그리고 민주노총

김민웅의 세상읽기 <50>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가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시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맺어집니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가운 소주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본명 박기평, 필명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의 대목입니다. 세월은 흘러 그는 지금 노동운동의 현장에 더 이상 있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영성전환을 위한 모임을 주도하는, 이전의 전투적 노동혁명가가 아닌 어찌 보면 구도자적 경향으로 기울고 있지 않은가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박노해의 진화인가 아니면 변절인가 하는 논란이 일각에서 일고 있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정신적 기초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그가 깨우쳤다는 점입니다.

달라진 세상에서 그에 걸 맞는 해법을 발견해야 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동일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과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억압하는 것은 그것이 권력이든 자본이든 또는 종교적 교리나 사상적 독선 그 어떤 것이든 역사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니이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말로 인간의 자유로운 생명의 힘을 억누르는 일체의 정신적 감옥을 해체하라고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그 니이체의 망치는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근육과 동일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등장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깃발은 혁명을 의미하는 붉은 바탕에 농민의 낫과 노동자의 망치를 상징으로 그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 “노동의 새벽” 역시 절망의 벽을 깨뜨리겠다고 외쳤었습니다.

1848년 유럽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고 난 이후 유럽은 노동대중의 각성과 변화의 열정이 치솟아 오르고 이들의 변혁의지는 아직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구체제 앙시앙 레짐의 청산을 향해 진군하게 됩니다. 부르주아의 일부는 이들 노동대중들과 연대하여 앙시앙 레짐 혁파에 나서지만, 노동대중들의 요구가 보다 명료해지면서 양자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계급적 경계선이 그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 이제 겨우 30세에 불과한 한 지식인 혁명가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그의 맹우 엥겔스와 함께 발표합니다. 그 첫줄은 “어떤 한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유령이다. 유럽의 모든 낡은 세력들은 이 유령을 내쫒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것이 낡은 세력에게는 유령일지 모르나 결국 미래의 역사를 주도하는 힘이라고 말했고, 공산당 선언의 말미를 이렇게 끝냅니다. “프로레타리아는 이제 자신들을 얽어매고 있던 족쇄 이외에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승리로 쟁취할 세계가 앞에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들의 단결만이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언이 있고 나서 150여년이 흘렀습니다. 공산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 노동운동이건 인간을 자본의 지배 아래 놓게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대결하고 극복하려 했던 것은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어떤 사상을 표방하는가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든 근대적 진보주의는 이러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참되게 살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방법도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련 사회주의는 지상에서 사라졌고 사회주의 중국은 자본주의의 길로 맹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노동운동은 지금 도덕적 타락과 폭력사태로 인해 최대의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애초에는 노동자들의 인간적 권리를 옹호하고 그 존엄한 가치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바탕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면서 시작했던 진보적 이상주의는 말하자면 현실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고 있는 셈입니다. 또는 이제까지의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아예 그 목표점을 달리 잡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주의”는 사라지고 실패할 수 있어도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지켜내는 일은 비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류를 범하는 인간에 대한 질타와 비판은 당연하겠으나 절망의 현실에서 새로운 새벽이 오기를 간절하게 열망하는 이들의 심중에 있는 아픔과 기원 자체는 욕되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의 대의원회가 폭력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이 땅에 절망의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하고 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더불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이니까 말입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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