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그는 흥분하기 쉬운 성질이어서 그 때문에 종종 신경질을 부리곤 했지만, 그래도 그는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그는 기억력과 직관력이 뛰어났고,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발휘시킬 줄 알았다.
그의 일상생활은 어딘가 색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매일 한낮이 될 때까지 침대에 누운 채 조간신문을 훑어본 후 직무를 시작했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술에 애착을 느낀 그는 특히 제3제국의 기념비로 남을 만한 공공건축물의 건립을 소원했다. 사치나 여성편력 또는 미식가로서의 기질은 전혀 없었다.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였다.” (브리태니커 사전)
히틀러 개인의 성향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글들이다. 어떻게 이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6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전 국민이 불교도인 나라의 지식인이자 한 때 인기가 좋았던 역사 교사, ‘폴 포트’는 자신이 구상한 사회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당시 전 국민의 1/4에 달하는 2백만 명을 학살했으니 말이다.
하나의 생각이나 이념이 잘못되면 이런 언어도단의 끔찍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악마성(惡魔性)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먼저 히틀러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연 기축(己丑)
월 무진(戊辰)
일 병인(丙寅)
시 경인(庚寅)
이 사주의 장본인을 히틀러가 아니라 필자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필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운명을 예측할 것 같다.
대단히 명석하고 직관력이 뛰어나며, 미술이나 예술적인 소양이 풍부하다. 사회성은 뛰어나지 않으나 목표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고, 머리 회전과 행동력이 좋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흥분하기 쉽다는 문제도 있지만 동시에 금방 풀어지기 때문에 풍부한 감성을 지닌 매력적인 성격이며, 한때 대성할 수 있는 운명이다.
이런 명리학적인 판단이 실제 히틀러의 인생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히틀러라는 저 역사적인 사건의 장본인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아가서 수없이 많은 무구한 생명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람이라고 여기기에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이 태어난 생년월일시만으로 판단하는 명리학(命理學)이 지니는 한계이며, 또 사람의 운명은 사주(四柱)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과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양오행에 기초한 명리학의 유용성은 여전히 변함없다는 것 역시 필자의 변하지 않는 믿음이다.
그러면 히틀러의 생애를 그의 사주와 더불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사람의 운명을 살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태어난 날의 음양오행, 즉 일간(日干), 그리고 좀 더 부연하면 태어난 날의 간지(干支)와 같은 운이 오는 해부터 보는 일이다.
히틀러의 경우 날의 간지(干支)는 병인(丙寅)이다, 따라서 병인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해진다.
병인년을 찾아보면 1926년이 된다. 그 해 히틀러에게는 무슨 일이 발생했었던가?
1926년 2월, 병인(丙寅)년 경인(庚寅)월에 히틀러는 나치스의 당 간부회의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면서 당내 제1인자로 부상했다. 바로 이것이 히틀러가 역사속의 인물로 기억되게 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당시 저 악명 높은 친위대(Schutzstaffel)를 조직했고, 11월에는 돌격대를 다시 재건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 무렵 혹심한 경제 불황-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으로 인해 나치당은 중산계급의 지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의회를 통한 합법적인 활동에 의해 비로소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이복누이의 딸인 겔리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1931년 9월 18일 그녀가 자살할 때까지 항상 행동을 같이했다. 겔리는 히틀러가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이처럼 일간(日干)과 같은 해에 좋아하는 이성이 생겨 맺어지면 그야말로 평생 금슬 좋은 부부 인연이 되는 법이다.
아쉬운 것은 그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을 지니지 않았던 히틀러는 지극한 순정파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오래 살면서 히틀러와 맺어졌더라면 어쩌면 엄청난 역사의 비극을 완화하는데 큰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긴다.
히틀러가 나치스의 총수가 되기 전의 삶을 살펴보면 사실 그다지 특이한 인물은 아니다. 조실부모한 불우한 팔자에 미술지망생이었지만 실패했으며, 일차 대전에 참전하여 철십자 무공훈장을 두 개씩이나 받은 전쟁영웅, 그리고 미미한 정치조직인 나치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1924년부터 “나의 투쟁”이라는 이상하고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책을 저술한 것이 전부인 극렬한 애국자라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병인(丙寅)년에 가서 역사적 인물로 재창조된 것이다. 당시 그이 나이 37살 나던 해였다.
이처럼 대개 크게 성공하는 사람의 운명을 보면 자기가 태어난 날의 간지(干支)와 같은 해에 성공을 향한 커다란 계기가 마련되는 법이다.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들면, 바로 현 노무현 대통령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일의 간지가 무인(戊寅)일인데, 바로 1998년 무인(戊寅)년에 종로구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노사 문제의 해결사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감정을 해결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2000년 경진(庚辰), 한창 왕성한 운에 부산 지역구에 출마하여 낙선했지만 사실 이 낙선이 커다란 계기가 되어 ‘노사모’라는 새로운 정치바람을 만들어낸 것이 오늘날 대통령으로 이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히틀러의 경우, 대중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전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을 때부터였다. 법정에서 선고를 받기 전 자신의 신념을 밝힐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인상을 심어주었고, 아울러 옥중에서 저술한 ‘나의 투쟁’이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1925년은 을축(乙丑)년이라 인수(印綬)운이라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한 해가 된 셈이다.
대중 정치인으로 등장한 히틀러는 그 후 천부적인 대중 선동가의 자질을 발휘하면서 승승장구하다가, 급기야 1930년 경오(庚午)년 편재(偏財), 즉 대박 운에 나치당은 독일 총선에서 일거 제2당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히틀러는 1932년 임신(壬申)년 임수가 병화를 누르는 어려운 운을 맞이하여 대통령선거에서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고 당세도 다소 주춤거렸지만, 같은 해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를 하면서 여전히 세력을 잃지 않았다.
이어서 1933년 3월, 계유(癸酉)년 을묘(乙卯)월, 관인(官印)운에는 총 선거에서 나치당이 43.9%를 득표했고, 그 해 기미(己未)월, 기토가 계수를 상극하는 달에 일약 능력을 발휘하여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절대적인 독재체제를 확립시켜나가면서 군부의 지지도 얻게 되었고, 이 때부터 독일은 군비증강과 군수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국력은 욱일승천하여 드디어 유럽 제일의 강자로 부상했다. 동시에 그의 대중적 인기는 절정을 달리기 시작했고, 1934년 8월에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그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했다.
독일 국민들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했지만, 독재정치는 국민생활은 획일화하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권리를 묵살했으며, 반대파는 어김없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눈부신 능력을 발휘해서, 1933년 가을에 국제연맹에서 과감히 탈퇴한 후,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으며, 1935년 1월에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여 자르의 영유권을 회복했다.
또 베르사이유 조약의 군사제한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며, 영국과의 해군협정을 체결하여 독일 해군을 증강시켰다.
그러더니 급기야 1936년 3월, 병자(丙子)년 신묘(辛卯)월, 또 다시 히틀러와 같은 병화(丙火)가 오는 해에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을 강점하면서 히틀러의 위상은 최고 절정을 달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독일 내의 반 히틀러 세력은 완전히 존립 근거를 잃게 되었고, 그 해 가을의 베를린 올림픽은 그의 강렬한 힘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방적인 정치 선전 무대였다.
1938년 초, 무인(戊寅)년 식신(食神)운, 한창 잘 나가는 운에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성사시킨 후, 다시 그 해 9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실로 눈부신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 정말이지 이 당시 그는 독일 국민들로부터 ‘불세출의 영웅', '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그가 이렇듯 일방적으로 독일의 위상을 일방적으로 신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의 전쟁을 꺼려 영국과 프랑스가 꼬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926년 병인(丙寅)년부터 히틀러가 절정을 구가하던 1938년 무인(戊寅)년까지의 12년간이 히틀러의 세월이었다.
만일 이 쯤에서 히틀러가 무력 충돌로 나가지 않고, 적당히 물러섰더라면 세계사는 변했을까? 또 히틀러와 파시즘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아무래도 부정적일 것 같다.
그러면 다음 글에서 히틀러와 독일 제3제국이 어떻게 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섰는지에 대해 살피고, 히틀러의 인생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번 글부터는 지난 20세기를 만든 인물들에 대해 그 운명과 관련해서 살펴보는 시리즈를 몇 번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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