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은 영어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인 경우는 배제하고, 발음이 틀려도 말하는 사람의 ‘성의’가 인정되고 뜻만 전달되면 용서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설픈 발음 때문에 듣기가 불편하거나 표현의 격(格)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한국인의 근착 키워드인 ‘웰빙(well-being)'은 그 고민 없는 발음만으로도 천박한 느낌으로 와 닿는 경우다. 영어사전을 한번만 찾아보는 성의만 있어도 ‘well-being’의 제대로 된 발음은 ‘웰비잉’ [wélbí iŋ]임을 확인할 수 있건만, 대충주의 문화는 이런 사소한 성의를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영어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면 이것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See’ [sí ]의 진행형을 ‘시잉’ [sí iŋ]이 아닌 ‘싱’ [síŋ]이라고 발음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웰빙’이라고 발음해 버리면 ‘wellbing’[wélbíŋ]처럼 하나의 단어로 들려 왠지 경박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용접’을 뜻하는 welding[wéldiŋ] 처럼 무슨 지루한 행위동사의 진행형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어로 ‘bing’이란 단어는 웬만한 사전에는 없지만(거무스름한 양앵두의 일종을 ‘Bing cherry’라고도 하긴 한다) 우리말로 ‘딩동댕’ 쯤에 해당하는 싸구려 의성어로, 좋다는 반응을 가볍게 표현할 때 쓰인다. 흔히 속어로 ‘단칼에’ 또는 ‘뚝딱’을 의미하는 ‘bada bing’ 같은 ‘길거리형’ 표현에서 많이 쓰이곤 하는데, 특히 블랙코미디 시리즈 ‘소프라노스(The Sopranos)’ 따위에서 묘사되는 블루칼라 마피아들이 즐겨 쓰는 말로 인식되어 있다. (예: “Bada bing, I got it done.” – “뚝딱 해치웠지.”)
그래도 무엇보다도 ‘bing’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2차 대전을 전후로 코미디언 밥 호프(Bob Hope)와 2인조를 이루어 다작의 뮤지컬 코미디영화를 만든 팔방미인 가수 빙 크로스비(Bing Crosby · 1903~1977)다. 그는 본명이 해리 릴리스(Harry Lillis) 크로스비였는데,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의 이름인 ‘빙고(Bingo)’를 따서 붙인 ‘Bing’이라는 별명이 예명으로 따라 다녔다. ‘Road to Morocco’(1942)나 ‘Road to Utopia’(1946)등 그가 밥 호프와 함께 만든 여러 편의 코믹한 ‘로드무비’들을 본 사람이라면 이들 영화의 천연덕스럽고 익살스런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머금지 않기가 힘들 터이다. 하여간 ‘빙’으로 발음되는 단어는, 설사 단어로 쳐준다 할지라도, 묵직한 뜻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인 단어다.
영어로 ‘well-being’이라는 표현의 무게는 ‘존재’를 뜻하는 ‘being’ [bí iŋ]에 실려있다. ‘존재하다(be)’의 현재분사이자 동명사인 ‘being’은 한숨 쉬듯 길게 호흡하며 내뱉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항상 물음표로 남을 수밖에 없는 ‘being’, 이 단어 때문에 ‘well-being’이라는 표현은 ‘건강’이나 ‘풍요’ 따위의 소비문화와 쉽게 연결되는 상투적인 개념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원래 ‘well-being’이란 철학적인 개념이다. 철학에서 ‘well-being’이란 비도구적 차원에서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윤리철학, 특히 공리주의(utilitarianism)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well-being’을 쾌락주의이론(hedonist theory), 욕구이론(desire theory), 또는 객관적 결과주의(objective list theory) 등으로 세분하여 접근하는 움직임도 있다. 이 같은 철학적인 차원은 아니더라도, 실제로 미국에서는 ‘well-being’이라는 말이 대부분 진정한 심신의 건강 내지는 평안을 논하는 맥락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상품의 명칭에 붙어 다니는 형용사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렇게 철학에 뿌리를 둔 개념이 한국에 상업적 경로를 타고 수입되면서, 실존적 차원에서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웰비잉’은 어느새 소비문화를 겨냥한, 상품적 냄새가 진동하는 ‘웰빙’으로 둔갑해버렸다. 살아있는 자들(또는 살아야만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요구될 법한 존재에 대한 사색은 간데없고, ‘몸에 좋다더라’는 의미를 가진 하나의 게걸스런 외래어만 남았을 뿐이다.
이제 “우리의 소원은 웰빙”인가. 웰빙 의류에서부터 웰빙 체조, 웰빙 주택까지, 요즘 한국에서 ‘웰빙’이 붙어있지 않은 상품을 접하지 않고 하루를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북 어디엔가 ‘웰빙교회’가 생겼을 정도니, 그 광기의 위력을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어쨌든 경박하고 천박하다. 이러한 ‘웰빙 열풍’이 경박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 보려는 장사꾼들만의 탓은 아니며, 그 고민 없이 받아들인 외래어가 천박하게 들리는 것은 성의 없는 발음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본질은 수많은 군중이 아직도 ‘선진국적’인 물건이나 개념을 맹목적으로 집어 삼키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 속에 있다.
시끄러운 장터의 한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잠시 쉬었다 가는 마음으로, ‘웰빙’속에 파묻혀 있는 ‘being’이란 단어를 새삼스레 음미해 본다.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 중에서, 제목에 이 단어가 들어간 영화 세 편이 있다. 여기서는 짧게만 언급하겠는데, 이 중 한두 편은 언제 다시 느긋하게 들여다 볼 기회가 있으리라.
***Being There(1979)**
한국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겉모양만 좋은 사람이 단지 “거기(there)에 있다는 것(being)”만으로 출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의 부조리를 시적인 울림으로 불러낸다. 일평생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TV만 보고 살던 ‘챈스’(Chance · 영화에서는 ‘찬시’로 발음)라는 이름을 가진 정신박약자(피터 셀러스)가 우연한 교통사고를 시작으로 워싱턴의 상류사회에 편입되어 결국 차기 대통령 감으로 거론되기까지, 이 영화는 백인 상류층과 권력층을 신랄하게, 그러나 신기할 만큼 차분한 화법으로 풍자한다. 이 영화 제목의 ‘being’은 ‘존재’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 ‘있음’을 뜻하지만, 이 동사에는 실존적 화두가 실려있는 듯하다.
***Being John Malkovich(1999)**
스파이크 존즈 감독(각본 찰리 카우프먼)의 이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헛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실제 인물 존 맬코비치의 머리속에 들어가본 후에야 무언가 깨닫게 되듯, 이 영화를 직접 보지 않고는 그 줄거리가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목의 ‘being’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밖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영리한 이 영화가 존재(being)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태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기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초현실적인 설정으로 존재에 대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탐구하면서도, 이를 패러디와 희화로 포장함으로써 교훈적 메시지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한다. 나는 누구인가, 자의(自意)란 무엇인가, 혹시 나를 조종하는 자는 있는가 - 이런 근본적 물음에 대한 고민은 철저히 영화를 보는 사람의 몫이다.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1988)**
한국에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영화의 원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는 밀란 쿤데라의 원작에서 옮겨온 것이다. 존재(being)와 인간관계, 그리고 섹스에 있어서 가벼움(lightness)이란 과연 있을까. 이 영화의 토마스(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사비나(레나 올린)처럼 아무리 가볍게 살려고 해도, 탱크가 밀려오고 자유가 억압받는 역사의 무거움 속에서 그 인위적 가벼움은 결국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소(反蘇) 민주화운동을 배경에 깐 이 영화는 이제는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깊은 향수와 이상을 담고 있다.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자유에 대한 웅장한 사가(saga)인듯 하지만, 사실 감동을 주는 것은 개개인이 각자의 삶의 형태를 선택해 나가는 모습에 영화가 주는 섬세한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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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음미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무차별로 남용되는 외래어는 어떤가. ‘웰비잉’이 ‘웰빙’으로 둔갑해버린 현실을 단지 대수롭지 않은 발음상의 문제로 봐야 하나. 아니면 외래어 좋아하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장사꾼들이 문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인가. 외래어도 잘 쓰면 문화에 보탬이 됨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즉,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음미하지 않은 설익은 외래어가 그리도 쉽게 일상용어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문화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먹다 남은 음식이 쏟아져 나오는 나라에서 아이가 굶어 죽는 세상, 인재(人災)든 천재(天災)든 재앙이 휩쓸고 다니는 세상에서 ‘being’의 가치란 무엇일까. 나의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진정한 몸과 마음의 건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웰빙’의 천박함이 유난히 거슬리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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