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대체로 포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손을 놓는 것이 곧 새로운 출발을 위한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앞의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경우 더 이상 버티면서 잡고 있을 수 없다고 여기고 선택하는 절망적인 몸짓입니다. 그러나 뒤의 것은, 집착하고 있던 대상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그를 이제껏 묶고 있던 포승을 풀어주는, 깨달음에 따른 결정일 수 있습니다.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청년의 육체와 영혼에 살아 숨쉬는, 말하자면 자폐의 공간을 넘어서는 생명의 힘을 보여준 영화 <말아톤>은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때 벌어지는 사건의 숨겨져 있던 광채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제 30대 중반인 정윤철 감독의 첫 작품이자, 차세대 연기자의 선두에 서 있다는 화려한 평가를 받고 있는 조승우가 열연한 자폐아의 모습은 세상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지를 가진 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변과 단절된 현실 안에 갇혀 있다고 여긴 존재의 내면에 바다의 경계를 넘어 서려는 거센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는 꿈과 그 꿈이 가진 온도입니다. 그에 더하여 누구도 함께 해줄 수 없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42.195 킬로미터를 완주하는 과정에서 자폐 청년은 유아기의 어두운 멍에를 벗고 바람, 들판, 하늘과 하나가 되는 풍경입니다.
온 가족이 나들이 간 동물원에서 엄마는 자폐증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아들 초원이의 손을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맙니다. 일체의 정상적 교육을 향한 가능성이 닫힌 아들. 그로 말미암아 시련을 겪으면서 각자의 고통을 가장 큰 것으로 주장하며 서로 멀어져가는 가족. 이 와중에 엄마는 더는 견딜 자신을 잃어버리고 아들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는 이제 분리되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아들과의 의미 있는 소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선고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이내 그 결정의 오류를 절감하고 아들을 찾게 됩니다. 아들 초원이는 얼룩말이 있는 곳에서 쓸쓸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이후 엄마는 아들에게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강한 집착으로 일종의 “보상의 고행”을 감행합니다. 마라톤은 아들 초원이에게 그렇게 시작되고, 그것이 곧 인생의 최종목표처럼 다그쳐지게 됩니다.
어느새 그렇게 죽어라고 달릴 정도로 훈련에 임하는 것이 아들 초원의 진정한 소망인지 엄마의 사투에 가까운 꿈인지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누구도 쉽게 눈치 채지 못하게 아들 초원이에게 자라나고 있던 자신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었고 세상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아들 초원이는 TV <동물의 왕국>에서 본 장면과 설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야생의 얼룩말은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으며, 결국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달리기를 배운 후 엄마 곁을 떠난다”고 말입니다.
청년 초원이는 자폐 교정을 위해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을 넘어서서 자신에게는 더 크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생의 달리기”를 자신의 목표로 선택합니다. “마라톤”이 “말아톤”으로 표기되는 대목은 초원이의 얼룩말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에게 마라톤은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이 되는 과정이었던 셈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엄마는 아들의 손을 마침내 놓아 줍니다. 그것은 어릴 때의 손놓기가 의미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깊이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집착하고 있던 대상의 자유를 위해 새로운 축복을 비는 간절하고도 경건한 기도와도 같은 힘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청년 초원이는 더 이상 그 순간 자폐아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황홀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로 빛나게 됩니다.
천성산 공사를 둘러싸고 잠시 발파작업을 중단하고 환경 재평가를 요구하며 1백일에 가까운 단식을 하고 있는 지율스님의 요청에 정부는 여전히 무시인지 그저 침묵인지 모를 상태에 있습니다. 스님의 뜻에 동참하는 이들은 종이 도롱용 100만개 접기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단식에 담긴 뜻을 권력이 손에서 놓아버리면 그것은 생명에 대한 포기가 될 것이며, 권력이 자존심과 집착을 손에서 놓으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축복이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폐증세는 시작됩니다. 권력이 현실과 단절된 자폐아가 될 때 푸른 초원은 야생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마도 우린, 이 시대의 생명을 위해 새로운 방식의 “말아톤”을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숨이 턱에 차올라 더 이상 뛰지 못할 것 같은 순간에도, 맹수의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뛰어야 하는 초원의 슬픈 얼룩말처럼 말입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