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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그리고 땀보프로 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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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그리고 땀보프로 가는 소년

김민웅의 세상읽기 <46>

용모가 준수한 청년 나르시스는 산과 들을 거침없이 다니면서 청춘의 활기를 뿜어내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 모두가 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 여겨졌고 그가 마음먹고 원하는 것이면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나르시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숲 속의 많은 아름다운 요정들이 그에게 관심을 표했지만, 나르시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나르시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욕구하는 바를 이루는 일이었지, 다른 존재들의 기분이나 생각 따위는 그다지 의미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르시스는 어느 호수 가에서 몸을 굽히고 물을 마시려던 찰라, 그 물 속에 있는 아름다운 요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너무나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나르시스의 마음은 물 속의 한 아름다운 청년에게 깊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가진 최초의 타자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알고 보니 결국 자기 자신이었지만 말입니다.

이 장면은 동성애적 사랑의 한 원형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각성의 시작이라는 것이 보다 옳을 것입니다. 거울을 보면 불행해진다는 태어날 때부터의 신탁으로 해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나르시스에게 물 속에 비친 모습이 바로 자기임을 깨닫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물 속에 손을 넣어 그 요정을 만지려 했지만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물 속의 요정은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껏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계속 응시하면서 메아리 없는 대화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이제 그에게 무의미해졌습니다. 산과 들을 쏘다니던 것도 그를 더 이상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버린 나르시스는 마침내 그곳에서 기진한 채 자신의 생명을 잃고 말게 됩니다. 그가 오직 몰두한 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이었으나 정작 그 아름다움을 가진 물속의 존재는 그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려 들지 않았고 그 어떤 손길도 그에게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절망감 속에서 죽어간 나르시스는 그 호숫가를 못내 떠날 수 없어서 이후 수선화로 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아직도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하는 그리스 신화. 잘 알려진 옛이야기지요.

그런데 이 나르시스를 지극히 사랑했던 한 귀여운 요정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에코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나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헤라 여신에게 벌을 받게 됩니다. 그 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남이 이야기한 후에 비로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마저도 남이 이야기한 것을 반복하는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만의 언어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슬픈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나르시스에게 반해 아무리 그녀의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도 나르시스의 말을 되풀이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에코는 상심한 끝에 산 속 깊은 곳에 외롭게 살다가 여위어 갔고 그러다 몸은 말을 잃은 무심한 바위가 되고 목소리만 남아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코우가 영어로 메아리라는 말이 되었다 하지요.

실로 따져보면 나르시스의 불행은 자신에게 깊은 마음으로 다가온 상대를 대화 없는 메아리가 되게 하고 말았다는 데서 시작했던 셈이었습니다. 자신에게만 몰두했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껏 알지 못했던 자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그에 취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타자의 목소리, 타자의 아픔, 타자의 꿈을 품어 안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자기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한 수준에 머물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여 그것은 이 세상 밖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다만 물 속에 갇혀버린 자신의 안타까운 그림자”에 불과해지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한 소년이 땀보프에 가려 했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땀보프는 항구였습니다. 그리로 가는 비행기도, 기차도 배도 없지만 소년은 항구 땀보프를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몰두해 있던 소년이 이윽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함께 할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호수에 비추인 풍경으로 끝내지 않고 더 큰 세상을 가슴에 담아내는 자로 우뚝 서려 했습니다. 작은 파도 소리에서도 그 소년은 생명의 숨결을 들었고, 그 어느 소리도 외로운 메아리로 남겨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소년의 주변 모든 것이 다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만 몰두해버리는 사이에 혹 우리 주변을 외로운 메아리로 남겨놓아 버리는 일은 없을까요? 정치는 지금 에코 없는 나르시스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린, 내가 말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남이 말을 할 수 있게 해버리는 슬픈 형별을 상식으로 알고 지내지는 않는가요? 그래서 그만 많은 이들을 말을 잃은 고독한 바위가 되게 하고 스스로는 고개 숙인 수선화로 호숫가에 아프게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서로를 외롭게 하는 이 시절, 땀보프로 가려는 한 소년의 노래가 우리 마음에 새로운 기운과 흥겨움을 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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