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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결별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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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무꾼, 그리고 결별의 정치

김민웅의 세상읽기 <44>

노총각 나무꾼의 처지가 안타깝기는 해도 천상의 선녀를 자기 곁에 붙들어 두는 방식은 아무래도 고약했다는 비난을 면키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네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본 것도 그렇거니와, 옷가지마저 숨겨버렸으니 마음을 얻기보다는 별 수 없이 주저앉게 만들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금강산 어디에선가, 그것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사나이에게 시집오겠다는 처녀를 만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추격자로부터 보호해준 대가로 비밀을 하나 알게 됩니다. “선녀들의 하강(下降)”과 그 선녀 가운데 하나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는 방도에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사슴은 야생의 맹수와는 대립되는 약한 존재로서 나무꾼의 사회적 처지와 동일시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알아준다는 식으로 사슴과 나무꾼은 아주 신속하게 서로의 고달픈 사연을 꿰뚫어 느끼고 한 편이 됩니다. 그러기에 선녀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른바 공모자가 되는 과정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사슴은 시베리아 지방에 뿌리를 두고 남하해 온 종족에게는 지상과 천계를 이어주는 일종의 “샤만적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순록이 이끄는 썰매를 타고 이동하던 시기의 집단적 기억이 남겨놓은 흔적이기도 하고, 사슴뿔의 신화적 형태가 주는 상징성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말하는 사슴”은 지상과 천계의 고리를 이어주는 지점에 있는 신묘한 동물이라는 차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지게 된 비밀이 나무꾼의 지속적인 현실이 되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바가 있었습니다. 아이 셋을 낳기까지 선녀의 날개옷을 절대 내놓지 말라는 밀지(密旨)였습니다. 나무꾼의 입장에서 보자면, 선녀로서는 애초에 애정으로 시작된 관계가 아닌 이상, 두 사람 사이의 결합이 강력해지기까지의 시기와 조건이 성숙해지는 상황까지 가져야 할 지혜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꾼은 이를 결국 지켜내지 못하고 맙니다. 아내의 간청에 마음이 약한 그가 손을 들고 만 것이었습니다. 하여 사슴은 다시 이 나무꾼을 도와주게 되는데, 보름 날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천상의 세계로 가라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행복한 재회에 성공한 나무꾼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동화에서는 여기서 대체로 끝납니다. 신분상승을 성취한 자의 성공담이 되는 셈입니다.

허나 널리 알려진 대로 원본은 달리 결말을 맺습니다. 천상의 세계에 취해 있다가 퍼득 정신을 차린 나무꾼은 지상에 혼자 계신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매일 눈물짓습니다. 이에 선녀가 내어준 용마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이때 여기서 또 하나의 지켜야 할 바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발을 땅에 딛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늘의 사람이 되었으니 땅과의 새로운 인연을 이어나가지 말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본 어머니는 팥죽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이를 주는데 그걸 받은 아들이 그릇을 놓치는 바람에 용마가 뜨거운 죽에 놀라 그만 아들은 땅에 내동댕이쳐지게 됩니다. 하늘로 돌아가는 문은 그로써 닫힌 셈이고 아들은 상심에 깊이 빠져 지내다가 죽은 후 수탉으로 다시 태어나 첫새벽 하늘만 보면 울게 되었더라,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닭은 새이지만 하늘을 가로질러 날지 못하고, 아침 동이 트는 때에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립니다. 발을 땅에 붙이고 있으나 그 마음은 하늘을 향해 있는 셈입니다. 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나무꾼의 행운과 선녀의 불행이 서로 겹쳐 전개되고 있으며 고부간의 갈등까지 내밀하게 포함된 민중설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일종의 비극성을 보이면서 끝나는 까닭을 살펴보자면, 나무꾼과 선녀가 서로의 깊고 깊은 갈망에 대하여 금기의 방식으로 제동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땅에서의 현실과 하늘에 대한 갈망, 이 두 가지를 서로 조화시키면서 진실로 만나는 방법을 이 둘은 끝내 알지 못하고 맙니다.

각기 자신의 세계에 대한 경계선을 고수하는 가운데 서로를 결국 놓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치유하기 쉽지 않은 사회적 양극화의 현실에 살면서 선녀는 나무꾼을 업신여기고 나무꾼은 선녀를 증오하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슴은 추격자에게 쫓기고 있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있고, 어머니는 혼자 팥죽을 끓여놓고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고 말입니다. 두레박과 용마가 있다 해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고리가 될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 결국, 마음을 진실로 얻는 힘을 잃어버린 자리에서는 그 어떤 비밀의 능력도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략이 앞서는 정치는 처음에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 서로간에 결별로 가는 과정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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