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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정기(夢精期)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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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정기(夢精期) 3

김민웅의 세상읽기 <43>

청소년기는 무엇보다도 질적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육체적 성숙과 이성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이 두드러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인이 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거침없이 뿜어 나오는 때인 것입니다. 잠자고 있던 화산이 폭발하는 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기의 현실은 그 기운이 이성적 관심으로 몰입하지 않도록 하는 여러 가지 제약과 장치 속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건 당연하게도 일차적으로는, 당사자가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선택과 행동을 막기 위한 것이고 장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시기에 기운을 엉뚱한 곳에 쓰지 말라는 사회적 지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디 꼭 그렇게 모든 것이 틀에 묶여 청소년기가 엄하게 관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속의 수도자처럼 해탈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니, 이 이른바 꿈속에서도 무언가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는 “몽정기(夢精期)”라는 세월은 개인사적으로 “격동의 시대”라고 할 만합니다.

2002년에 나온 정초신 감독의 영화 <몽정기> 1편은 15세 중학생들의 이야기로 꾸몄고, 이번에 나온 <몽정기> 2편은 17세 여고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결국 두 편 모두, 아직은 미지의 세계인 성에 대한 온갖 웃지 못할 상상력을 담은 아이들의 치기 어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돌아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짓게 만드는 어른들의 “몰래 숨겨왔거나 아니면 끼리끼리는 이미 나누어왔던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의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거나 경험해본 척 한다든지 또는 선두에서 경험자의 지위를 획득하려 하고 그걸로 또래 집단 내부에서 대장노릇을 해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해본 척”과 “안 해본 척” 사이의 과장과 내숭의 시간적 거리는 사실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지만 그 틈새에 존재하는 시기의 눈동자는 사뭇 반짝거리면서 이성의 세계에 있다고 알려진 온갖 전설과 소문을 수집하는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젊고 잘생긴 남자 교생 선생님, 또는 예쁜 여자 교생 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진지한 연정(戀情)은 또래의 아직은 영 미성숙해 보이는 모습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교실을 묘한 발랄함으로 채웁니다. 만화 <캔디>에서 나오는 테리우스와 캔디의 성인판을 꿈꾸면서 황홀해하는 아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소년과 소녀의 소박하고 순수한 떨림을 담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하게 하는 곽재용 감독의 영화 <클래식>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진화 내지는 변화라고나 할까요. 20대의 빛나는 청년 연기자 조성우, 손예진, 조인성에게 단편 문학적 아름다움을 입혀준 <클래식>은 사방 천지에 성욕을 자극하는 환경에 살고 있는 현실에서 망각된 사랑의 원초적 순수를 일깨웁니다. 이제는 고서점에나 있을 법한 <몽정기>의 본류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러한 <몽정기>가 끝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 발육으로 인한 욕구가 앞서는 유혹보다 더 강하고 높은 차원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이른바 "강아지 사랑"이라고 하는 “퍼피 러브(puppy love)"의 마지막 장이 닫히면서 사모함, 그리움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는 “연가(戀歌)”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청년기는 사랑에 대한 성찰의 힘을 얻어가게 됩니다. 자기만의 욕구에 충실한 몽정의 환각에서 깨어나 마음이 깊어지고 상대의 존재를 최선을 다해 존중하며 아끼는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유치하게 보이는 몽정기가 어리숙하면서도 발랄하고, 그러면서도 밉지 않고 귀여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려는 순수함이 있는 까닭이요, 그 다음의 성숙을 내다볼 수 있는 나름의 진지함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식하지 않는 청춘의 힘이 있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는 여전히 몽정기를 거치지 못하고 있나봅니다. 자기 욕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기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귀엽지도 솔직하지도 않고 진지함도 잘 느껴지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니 믿기는 더더욱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직도 “해본 척”과 “안 해 본 척” 사이의 과장과 내숭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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