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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도시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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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도시의 기다림

김민웅의 세상읽기 <39>

겨울과 마주한 도시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냉기(冷氣)를 이겨내는가 봅니다. 한파(寒波)가 몰아치는 저녁, 도시는 사람의 물결을 쏟아냅니다. 그럴 때면 거리는 갑자기 거대한 바다로 변모하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퍼득거리는 물고기들이 저마다의 방향을 정해 유영(遊泳)하는 <환상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계절의 태양이 서둘러 귀가해야 하는 파수꾼처럼 물러나면, 드러났던 것과 감추어졌던 것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시간이 오게 됩니다. 도시의 얼굴은 밤이 오면 화장을 하기 시작하는 여인처럼 유혹적이 됩니다. 그건 한낮에 보였던 엄숙함, 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하는 사무적인 표정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경계망이 풀린 자유의 발랄함이 권리를 행사하는 현장입니다. 그것은 겨울 한복판의 예기치 않은 열기(熱氣)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옷깃을 단단히 여미지 않으면 뼈 속까지 시린 날도 있는 법이고 그보다 더 추운 자신의 현실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기에, 겨울은 마냥 환상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어떻게든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언젠가 나무에 물이 오를 때 그 자신도 기어코 꽃을 피워내야 하는 힘을 길러내기 위해 지나야 하는 가파른 언덕이기도 합니다.

해서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이라면, 그건 그만 징벌이 되고 말 수 있습니다. “4계(四季)”의 변함없는 운행(運行)이 있기에 이 계절은 축복입니다.

시인 이성부는 겨울의 한 복판에서 이렇게 봄을 기다립니다.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 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 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기다림마저 잃을 때에도” 온다는 것입니다. 화사한 도시의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을 괴롭게 바라보며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쳐버리고 말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도 시인은, 그 기다림의 상실이 곧 사계의 운행이 정지되는 것을 뜻하지 않음을 일깨웁니다.

물론 그 기다림은 막무가내로 속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급한 사연을 품은 바람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너무도 더딘 걸음걸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채 깨지 않은 모습으로 눈 부비며 산발(散髮)의 헝클어짐을 가다듬지 못한 채 겨우 일어나는 것 같아, 기다리는 이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건 “마침내”라는 확신이 있는 몸짓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놀라운 선언을 여기서 합니다.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그 “먼데”란 어디인가요? 세월이 지나 돌아보면 아득하고, 기억에도 희미하게 멀기만 한 자리에 우린 지금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당장의 현실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운 숨가뿐 상황이 뒤덮여 있고, 밖으로 통하는 문을 찾기 어려운 미로(迷路)로 이어진 벽처럼 되어 있어 우리는 주춤거리며 고뇌하고 있는지도 또한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기고 돌아오는 자”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마음속에 떠오른다면 우린, 다시 일어서서 겨울의 도시에 자신의 무대를 꾸미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건 이 계절의 숨어 있는 축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화려한 조명이 없어도, 이름난 악단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자신을 객석이 텅 빈 이후에도 끝까지 지켜봐주는 이가 있다는 믿음 하나만으로 족합니다.

언젠가 제가 쓴 시의 한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린 서로에게/숨 막히는 순간들,/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시야(視野)가 거침없는/하늘이 맞닿은 아침벌판.” 서로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겨울 도시의 아름다운 저녁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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