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치와 하림의 사랑과 갈등. 그러나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이들의 삶은 일제하의 민족적 수난을 넘어 분단의 경계선에서 벌어진 내전의 폭풍과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여옥은 대치와 하림이라는 두 사나이 사이에서 고뇌하며 사랑의 완성을 향해 몸부림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합니다.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이 <여명(黎明)의 눈동자>를 1981년 신문소설로 발표하자 세상은 일제하로부터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에 이르기까지 금기로 덮여 있던 많은 사실들에 대해 눈뜨게 됩니다. 그것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고 있기는 했지만 다분히 역사소설적 시선으로 우리의 민족사를 파고 든 노력이었습니다.
물론 김성종의 원작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반공주의적 관점을 우선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1985년에 출간된 이병주의 <지리산>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여명의 눈동자>가 드라마로 올려졌을 때에는 내용과 시각이 달라지는 면모를 보입니다만, 아무튼 그런 이념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소재와 극적 전개로 상당한 대중적 관심을 모았습니다.
일제 학병으로 끌려갔던 사나이가 이후 만주벌판에서 중국 팔로군, 광복군 등과 연계되어 있다가 인민군 장교가 되고, 빨치산 대장으로 변모하는 과정. 이와는 대립적으로 미군의 진주와 함께 해방정국에서 미군정 체제의 핵심 요원이 되는 운명. 그 사이에서 남과 북 그 어디도 자신의 조국으로 선뜻 선택할 수 없었던 한 여인의 슬픔은 그런 세월을 통과해온 세대의 암울한 밤을 의미했습니다. 해서 동트는 새벽, 여명을 기다리는 눈동자에는 역사의 비감어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작품 <여명의 눈동자>가 당시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바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은 오늘날 종군 위안부로 불리는 “정신대(挺身隊)”의 존재를 드러낸 대목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 여옥이 정신대로 끌려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일군에 의해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장면들은 소문으로만 돌고 있던 역사를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이 이민족의 제국주의 야욕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짓밟힌 현장을 압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끝이 날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윤간(輪姦)이 “종군 위안”이라는 정책의 이름 아래 자행된 동남아시아 일군(日軍) 주둔지의 잔혹한 밤. 그 밤을 지새우며 여옥은 자신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을 것인지를 수없이 가늠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조선의 딸 여옥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일본군 그리고 이른바 대일본 제국의 대본영이 저지른 만행은 세월이 흘러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입증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당시 조선여인들의 입에서만이 아니라 필리핀, 중국 등지의 아시아권 여성들의 통곡과 분노에 찬 폭로로 온 세상에 그 진상을 확인하게 합니다. 역사는 다시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명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이 죄악의 중심에 있는 일본 우익은 여전히 도리질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논하는 것은 패배주의적 역사관이자 일본정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음모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역사의 진실을 지우고 일군의 영광과 위력을 과시하는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가 이 정신대, 즉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 방영을 하는 과정에서 일부 우익세력의 간섭과 외압이 있었다는 소식입니다. 정신대와 관련한 일군의 공식기록까지 발굴되어 공개된 상태임에도 말입니다. 이들에게는 여옥은 역사에서 은폐되어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옥은 과거형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치와 하림의 아픔은 또한 과거사가 아닌 듯 합니다. 일본군의 위용을 위해 또다시 역사를 유린하는 자들이 있는 한, 그리고 이에 대하여 그저 침묵하고 있는 이 나라 지도자들이 있는 한, <여명의 눈동자>는 거듭 새롭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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