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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그리기, 그리고 "실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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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그리기, 그리고 "실용주의"

김민웅의 세상읽기 <37>

그의 글을 읽은 이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만, 최근 <강의: 나의 고전 독법>을 펴낸 신영복 선생은 그의 출판기념 강연에서 집 그리는 순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집을 그리라고 하면 지붕부터 그리는 데 반해, 직접 집을 짓는 목수의 경우에는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마당, 기둥, 문짝을 그린 뒤 가장 나중에 지붕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집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과 집을 직접 만들어 본 사람의 차이가 드러난 셈입니다.

이 이야기를 인식, 즉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실제 집을 짓는 노동의 과정과 관련이 없는 사람의 경우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경향이 있게 될 수 있음을 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밑에서부터 땅을 파고 주춧돌을 놓은 후 힘을 다해 기둥을 세우는 현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거나 깊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집의 기초를 만드는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명령하는 자, 지휘하는 자, 힘을 가진 자가 이런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 아래에서 일하는 이들은 매우 고단한 하루하루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위와 아래의 소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남의 부재(不在)”가 이루어내는 비극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배려가 아니라 닥달과 응징, 그리고 책임전가의 일상화가 펼쳐지게 됩니다.

한편, 이 집 그리기 순서에 있어서 지붕을 먼저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집의 기초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만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마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영복 선생도 이 점에 대해 염두에 두셨을 것으로 봅니다. 집의 기초란, 집을 어떤 모양으로 짓고 싶어 하는가 하는 전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고 웅장한 지붕을 가진 건축물과 그렇지 않은 집의 기초 작업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문제는 지붕을 그릴 때에 기초를 함께 생각하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수의 경우에는 집의 모양, 그 집의 지붕이 어떤 생김새인가가 이미 그 마음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에 따라 먼저 기초를 그리는 방식을 취했으리라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그가 주춧돌을 놓는 그 순간, 그의 마음에는 지붕의 높이와 집의 크기가 벌써 그려져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수가 그리는 순서 속에 숨겨져 있는 지붕의 모양을 다만 알아차리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주춧돌과 기둥은 그 위에 얹어놓을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집 그리기 순서의 문제 안에는 집의 전체적인 모양에 대한 꿈과 관련한 논의가 담겨져 있음을 동시에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위와 아래를 하나로 통찰하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집을 짓는 기초와 더불어 어떤 집을 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소통의 성숙을 또한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 주춧돌이 쓸 만한 것이냐 기둥이 보기에 좋은 것인가 하는 등의 논란이 중심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건 일견 문제가 없을 실제적이고 실용적 논의인 듯하지만, 이는 집의 전체 구조와 어울려 사고 할 때 의미가 있게 마련인 것을 망각하기 쉬운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정치권에서 “실용주의”라는 말이 부쩍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쥐를 잡는 데 그 고양이가 희면 어떻고 검으면 어떤가 하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라고 할 만 합니다. 그런데 등소평의 이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정치철학의 바닥에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것이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어떤 지붕을 얹힌 집 모양인가 하는 점이 먼저 그 마음에 설계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의 경우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급행”이라고 써있으면 빨리 가니까 좋은 게 아니냐 식의 십리도 못 가 발병 날 근본 없는 실용주의론이 성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집의 모양새에 대한 사회적 성찰의 성숙이 없는 채로 우선 집이 필요하다고 먼저 땅을 파고 이 만하면 쓸만하지 하고 고른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는 식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원하는 지붕을 얹어놓을 때가 되자, 이거 아니로구나 하고 다시 땅을 파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일을 반복하게 되면 어쩌지요? 그게 어디 한 두 번이었습니까? 이는 “무지한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을 지어나갈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성찰의 행위를 “실용주의”라는 이름 아래 쓸모없는 것으로 지탄한다면 우리의 집짓기는 밤낮 땅만 뒤엎다가 세월 보내는 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 깐에는 기껏 힘들여 세웠다 해도 결국 비가 새는 집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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