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장주몽접(莊周夢蝶)”, 그리고 나비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장주몽접(莊周夢蝶)”, 그리고 나비는?

김민웅의 세상읽기 <35>

“장주몽접(莊周夢蝶)”이라고 있지요. 이를 풀면, 장주가 꿈꾼 나비, 즉 “장자의 나비 꿈”이라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장자몽접”이지 왜 “장주몽접”인가? 그건, 장자(莊子)에 붙는 “자(子)”는 공자, 맹자처럼 “높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이라는 존경의 칭호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고, 장자의 본래 이름이 “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장자인가 장주인가가 문제는 아니고, 그 꿈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의 대강은 세상에 이미 잘 알려지긴 했으나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잠이 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면서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 다녔던 것이다. 나비는 자신이 장자인지를 까맣게 잊었든지, 또는 모르는 채였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로 돌아와 있다. 하여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에는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꿈에서 깨어보니 나는 분명 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깨어나 장자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이 이야기는 흔히들 거론하듯이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 또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보다 깊게 던지게 만든 장자의 화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꿈속의 나비가 자신이 장자인 것을 모르는데, 그렇다면 꿈을 깬 장자가 자신이 혹 나비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이를테면 “꿈과 각성상태의 경계선을 의식하면서 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더 확대 해석해보자면, 일체의 만물이 너 나의 구별 없이 다 하나가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르는 매우 동양적인 명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장자는 자신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그저 자신의 몸을 들판에 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묻게 되든지 결국 하늘을 나는 새의 몸, 아니면 땅에 있는 벌레의 몸이 되거나 할 텐데 그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몸이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온 세상이 또한 내 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니 그런 존재의 마음의 크기는 그야말로 우주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와 같은 제법 고풍스러운 논의와는 달리, 장자 개인에게로 집중해보면 이 꿈의 정체는 세속의 이런 저런 굴레에 묶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삼라만상을 즐기며 날개를 펄럭이고 훨훨 날아다니는 삶을 꿈꾸어 온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언뜻 정신을 차려보면 현실의 여러 제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어 그로 인해 고뇌하는 장자가 떠오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정 자신의 정체일까 하고 묻게 되는 것이겠지요.

인간이란 사실 내가 누구인가를 아예 물을 이유도 없이 꽃 사이를 유쾌하게 날아다니는 나비로 살고 싶지만, 정신을 차리고 깨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꿈과는 사뭇 다른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인간은 나비로서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장자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하고 부단히 결정해가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비 꿈을 꾸지 않는 장자”는 장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여 나비와 장자의 관계는,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자가 되었는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장자가 어느 날엔가는 과연 나비가 될 수 있을까?로 이어지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라크 저항 단체의 한국인 인질 납치, 교육인적자원부총리 인사 패착, 어느 골목길에선가 실종된 개혁, 경제논리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교육철학으로 말미암은 대학의 인문학적 위기, “참여정부”의 사라지고 있는 “참여”, 무너지는 민생경제, 어물쩍 부패한 언론 그리고 참담한 사회적 양극화. 오늘의 장자가 목격하고 있는 우리 현실의 이름입니다. 그 어디에도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가 될 애벌레의 유체(幼體)가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꿈꾸기를 멈추어버린 정부”가 있다면, 그러고도 계속 자신이 이 시대의 고민을 성찰하는 장자라고 여긴다면, 그건 이런 동요를 습관처럼 부르는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장주몽접(莊周夢蝶)>이야 옛날에 망각한 것 같고, 정작 나비가 오고 싶을 만한 꽃밭일랑은 제대로 가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김민웅 박사가 강의하는 ☞ 투기자본경제교실 "투기자본에 저항하라" 자세히 보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