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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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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 이후

김민웅의 세상읽기 <34>

고구려의 평강왕은 자기 딸이 자꾸 울면 장차 평민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말하자면 신분강등과 관련한 협박이었습니다. 울지 말라는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공주로서의 모든 기득권을 상실할 것을 각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운다면 그것이 왜 우는 것이고 어떻게 달래야 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버지였던 셈이었습니다. 예전에, 아이들이 울면 “에비 온다”하고 무섭게 만들어 울음을 뚝 그치게 했던 방식의 오랜, 그러나 별반 칭찬할 것이 못 되는 습관의 뿌리 그 한 가닥인 듯 합니다.

더군다나 평민 중에서도 바보라고 소문이 난 온달과의 결혼을 징벌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그가 빈궁하고 배운 것 없이 사는 민중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민중의 삶을 돌보지 않고, 왕궁의 생활에 안주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평강공주는 울지 말라는 왕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으면 공주로서의 신분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일종의 저주를 도리어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버립니다. 그녀는 기득권을 누리는 방식으로 적당히 자신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온달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묘하게도 그녀에게는 온달로 대변되는 당대의 서민들이 처한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르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같은 현실을 놓고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가져오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었다면 그녀가 스스로 징벌의 덫에 걸어 들어갈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처녀의 무모한 선택일 듯하지만, 평강공주가 온달의 노모를 만나 갖추는 예나, 장부 온달을 만나 그에게 청혼을 하는 모습은 이 이야기의 현실 무대인 1천4백 년 전인 6세기 당대뿐만이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상식의 세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파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연유는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의 누추한 삶과 빈곤한 행색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들처럼 요령을 부리면서 이득을 취하지 않는 삶 때문이었지 않나 합니다. 이후 그가 장군이 되어 국운을 일으켜 세우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그가 애초부터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 세상이 보기에 그렇다 함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빈한해도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으며 비루하게 처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강공주는 그런 온달의 바보스러움 속에 있는 비범함을 꿰뚫어 본 것일까요?

아니나 다를까, 평강공주는 남편 온달에게 왕이 타고 다니던 말 가운데 약해지거나 병들어 있어 내어버릴 것들을 골라 가져오게 합니다. 왕의 말이니 분명 준마(駿馬)일 터이고 잠시 기운이 빠져 그러한 것일 뿐, 잘 보살펴 주고 기운을 북돋아 주면 본래의 기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온통 건 공주의 사랑으로 온달은 기력을 찾은 준마와 하나가 되어 고구려 들판을 가로지르는 으뜸가는 장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국란의 위기 앞에서, 기득권에 안주했던 자들이 지키지 못하고 있는 나라의 운명을 지켜내는 수호신이 됩니다.

저건 바보짓이지, 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에도 자신의 출세를 돌아보지 않고 역사의 대의에 충실한 사명감으로 살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백성의 마음을 대변하는 평강공주와 결혼해서 궁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하게 됩니다.

신분상승의 늪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과거의 자신이 정말 “바보처럼 살았군요” 하고 뒤늦게 깨달은 것인지 또는 뭔가를 잘못 기대한 우리가 다 바보였던 것인지 알 길이 없군요. “바보 온달” 앞에 붙어 있는 “바보”는 아무에게나 쓰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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