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구원할 신(神)을 잉태한 민족이 어느 민족인지, 당신은 아십니까?
도스또옙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샤또프는 스따브로긴에게 그렇게 물었다. 짜르의 학정에 신음하는 러시아를 고뇌하던 도스또옙스키는 샤또프의 입을 빌어, 메시아는 러시아 민족 안에 있다는 자부와 희망을 그런 식으로 표시했을 것이다.
신을 잉태한 민족. <악령>을 읽은 지 30년이 넘은 지금에도 이 구절은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삼선 개헌으로 치닫고 있던 무렵, 나는 이성을 잃은 정치권력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메시아의 강림을 염원하던 도스또옙스키의 말은 계시처럼 다가왔었다.
우리가 절대자를 만나는 것은 대개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이다. 기도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절대자는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갈망, 타는 목마름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짜르의 학정을, 이성 잃은 정치권력을 온 몸으로 거부하면서 절대자에 의지하고자 하는 갈망, 그러한 갈망들이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익산 미륵사 터를 자주 찾는 편이다.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석탑이라는 서탑이 전설처럼 서 있던 곳, 그리고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얘기가 아련히 서려 있는 곳.
지난 겨울 미륵사 터를 찾았을 때, 근래 복원된 동탑만이 객처럼 낯설게 서 있는 빈터에서 내가 도스또옙스키를 떠올렸던 것은 도스또옙스키에 못지 않은 염원으로 미륵의 하생을 기원했던 백제 무왕(武王) 때문이었다. 삼국유사 기이편 무왕조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얘기를 전해 주면서 마지막에 이런 대목을 덧붙이고 있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을 때 못 가운데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무왕은 수레를 멈추고 경배했다. 왕비가 그곳에 절을 세워주기를 원하여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헐고 못을 메워서 절을 세우는데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전각과 탑, 낭무(廊黛)를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이 글이 미륵사에 관한 문헌 기록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사 터는 그러나, 이 짤막한 기록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폐허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 폐허의 거대함은 4만 평에 달하는 미륵사 터의 넓이라든가, 세 개의 9층탑과 숱한 당우들을 거느렸다는 가람의 규모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사자사, 용화산, 미륵삼존, 세 곳의 전각과 탑. 이런 단어들이 숨은 그림들로 바뀌어, 미륵사를 세운 무왕 부부의 거대한 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사라는 이름은 도솔천으로 상생한 미륵보살이 앉아 있는 칠보대 안, 마니전 위의 사자좌를 가리키며, 용화산은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이 그 아래에서 법회를 한다는 용화수를 상징한다. 그리고 세 곳의 전각과 탑과 낭무는 미륵이 행하는 세 번의 법회를 상징한다. 이렇게 새기다 보면, 이들 단어 몇 개가 미륵 하생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입적 후 도솔천에 올라가서 천중(天衆)을 상대로 설법하다가 56억7천만년 후에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로 하생한다. 그리고는 세 차례의 설법으로 석가모니가 구제하지 못한 96억, 94억, 92억의 중생을 차례로 교화한다는 것이 미륵하생경의 내용이다.
미륵사라는 건축물은 이러한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 일본의 어느 곳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건축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륵사 건립은 바로, 미륵부처님이 백제 땅 익산에 하생하여지이다라는 무왕 부부의 염원을 말해 주고 있으며, 나아가 백제 사람들에게 미륵 하생이라는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미륵사 건립 이전에 사자사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학자들은 백제의 미륵신앙이 상생신앙에서 하생신앙으로 바뀌어갔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경전에 따르면 미륵 하생을 보게 되는 왕이 바로 전륜성왕이다. 그렇다면 무왕이 못 속에서 나타난 미륵삼존을 경배했다는 점은 무왕 자신이 전륜성왕이 비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쯤 되면 무왕이라는 시호도 곱씹어볼 필요가 생긴다. 호반 무(武)자 무왕은 인도 대륙을 통일했던, 그러면서 부처 사후에 태어난 것을 한스러워하여 불교 포교에 진력했다는 아쇼카 왕을 지칭한 것이다. 어린 시절 '서동'으로 이름 없이 자라서 백제의 왕이 된 무왕이 전륜성왕을 자처했던 아쇼카 왕을 본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미륵사 터를 거닐다가, 그 동안 빈번히 미륵사 터를 찾았음에도 용화산을 올라본 적이 없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용화산 위쪽에는 또 사자암 유지가 남아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용화산을 올랐다. 생각보다 훨씬 가파른 바위길을 쇠난간에 의지하며 올라가다가 산 중턱 전망이 트인 곳에서 숨을 고르던 중에 나는 보기 드문 광경과 마주쳤다. 구름 속에서 뻗어나온 여러 줄기 햇빛이 미륵사 터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서광(瑞光)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흡사 도솔천이기라도 한 듯 눈앞의 풍경에 정신을 빼앗기면서, 나는 미륵삼존을 경배하던 무왕 부부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들이 염원했을 미륵 정토를 그려보았다.
미륵하생경이 묘사하고 있는 미륵 정토는 대략 이렇다. 기후는 온화하여 화창하며, 사계절이 순조로워 백 여덟 가지 질병이 없다.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다. 금은보화가 땅 위에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고, 옷이 나무에서 열려 사람들이 거두어서 입고, 쌀은 심지 않아도 거두는데 향기로워서 먹고 나면 앓는 일이 없다. 대소변을 보고자 하면 땅이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닫힌다. 밤이면 용왕이 향수를 비처럼 내려 거리를 적신다.
그런 세상에 미륵이 하생하는 것이다. 미륵은 기독교의 메시아에 비견되며, 정토는 유토피아에 해당한다. 미륵 정토는 그러니까 메시아가 강림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도스또옙스키는 신을 잉태한 민족이라는 말로 도탄에 빠진 러시아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를 갈구하였지만, 무왕은 국력을 기울인 미륵사 건립으로 미륵 하생의 염원을 간절하게 펼쳐 보였다.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갈구와, 미륵의 하생을 이루려는 염원. 그런, 타는 듯한 목마름들이 있었기에 도스또옙스키는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걸작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며, 무왕은 저 위대한 미륵사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미륵사 서탑은 지금 대수술 중**
미륵사 터는 근년에 많은 변모를 겪었다. 1980년에 시작하여 20년 가까이 행해진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거친 후, 절터 한 옆에 아담한 전시관이 생기고, 동탑 자리에 9층 석탑도 복원되고 하더니 급기야는 반쯤 남아 있던 서탑을 해체하여 복원하겠다는 대역사(大役事)가 다시 시작되었다. 서탑 가장자리가 콘크리트로 굳혀지고 볼썽사나운 덧집이 세워져서 서탑은 그 속에 갇힌 채, 부재들이 하나 하나 해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미륵사 서탑 해체작업이 난관에 부딪쳤다고 한다. 6층부터 2층까지 해체된 시점에서 열린 중간보고회에서, 탑이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붕괴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탑의 부재들이 무질서하게 재조립되어 초창기의 원형을 잃어버렸다는 점이 드러났으며, 원래 탑의 부재도 반 이상이 멸실되어 탑의 복원이 쉽지 않다는 점도 밝혀진 것이다. 애초의 기대처럼 제대로 복원하기도 난감해진 상태에서 해체작업을 계속하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른 셈이다.
문화재청의 원래 계획은 2008년까지 미륵사 서탑을 해체하여 복원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아 미륵사터 서탑을 살려내 주었으면 한다.
사진 설명) 복원된 미륵사터 동탑과 서탑 복원을 위해 세워진 덧집 전경
연재 순서:
01 메시아가 있는 유토피아 / 익산 미륵사터
02 갈항사터 상탑 앞에서 / 서울 경복궁
03 일승 아미타불의 깊은 뜻 / 영주 부석사
04 계집종 욱면에 관한 추측 / 고성 건봉사***필자 소개**
소설가, 사진가, 사진평론가.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1947년 경북 달성 생
1970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1972년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 중퇴
이후 우인 조규철, 방은 성낙훈 두 분 선생님께 한문을 사사했고 1982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에 입학하여 한 학기 동안 재학.
1982년 여름부터 1995년 말까지 대학 은사 동주 이용희 선생이 이사장으로 있던 대우재단에서 학술사업 담당 전문위원으로 근무.
1995년 말 대우재단을 사직한 후, 1996년부터 프리랜서로 소설, 사진평론 등을 하는 가운데, 3년동안 경주에 거주하면서 경주 남산 사진을 촬영하여 전국 순회전시 및 프랑스 파리 전시(한국국제교류재단 지원).
2002년 12월부터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저서:
중단편집 소금값을 청구함(청동시대, 1994)
장편소설 몽유금강(민음사, 1996)
장편소설 여자와 사진(눈빛, 1997)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세계의 문학 97년 가을호)
사진평론집 사진을 읽는다(눈빛, 1997)
월간 미술세계에 "김대식의 사진읽기' 연재(1998.7-1999.5)
사진집 경주 남산-천년 전의 얼굴들(미술문화, 1999)
월간 해인에 포토에세이 경주 남산 연재(2001,12 - 2003.11)
삼국유사 사진기행집 처용이 있는 풍경(대원사, 2002)
사진전:
경주 남산-천년 전의 얼굴들(1999-2002 서울, 경주, 대구, 부산 광주, 프랑스 파리)
경주 남산-얼굴 없는 불상들(2000 서울)
홈페이지: www.taeshik.pe.kr
이메일: imagen@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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