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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그리고 사랑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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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그리고 사랑의 계절

김민웅의 세상읽기 <32>

영화 “역도산(力道山)”에서 표현된 본명 김신락은 일본 씨름 스모 선수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자리를 향해 매진하지만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한계 앞에서 별 수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프로 레슬러의 세계로 뛰어들어 입신하는 과정은 굴욕스러운 삶을 이겨내려는 한 인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역도산 김신락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었던 현실이 아니라 과거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과, 그 비극의 자리를 걷어차고 나가려는 집단적 열망이기도 했습니다.

역도산이 일본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패전국 일본의 사회적 무기력감이 그 밑에 깔려 있었습니다. 역도산이 거구 백인 프로 레슬러들을 쓰러뜨릴 때 백인들과의 전쟁에서 진 일본인들은 역도산을 통한 대리전의 승리감을 맛보았고 그에게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도산의 삷은 프로 레슬링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고, 그의 심리상태 역시 불안한 지경에 몰리면서 어이없는 한 사나이의 칼부림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영웅의 쓸쓸하고도, 또한 영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직접 역도산의 경기를 보았던 기억을 하면 관중들이 그에게 얼마나 열광했던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의 큼직한 풍채와 단호한 표정, 그리고 사각의 링에서 제왕과 같은 위엄으로 상대를 격파하는 장면들은 어린아이들에게도 레슬링의 폭력은 보지 못한 채 강한 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역도산>에서 안타까웠던 것이 있습니다. 감독은 영웅주의적 신화로 그를 부각시킬 경우 너무나 상투적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었던 탓인지 모르겠으나, 비열하고 모순되며 어리석은 모습에 과도한 비중을 두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일본어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만일 오늘날의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싶습니다. 역도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사회의 영웅일 수는 없습니다.

영화에서 역도산은 후원자를 얻기 위해 비열한 수법도 서슴지 않고, 일본 군가를 부르면서 자신의 일본에 대한 충성심도 강조하며 돈을 주고 사전에 상대방 선수에게 경기승패조작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도 중도에서 문란해지고, 결국에는 술집 화장실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팬에게 스트레스가 쌓였던 그가 폭력을 휘두르다가 어처구니없게 칼에 찔려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미 조선인임이 밝혀진 역도산에 대하여 일본인들이 깊은 존경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그래 역시 조센징들은 비열하고 어리석다”라고 조롱할 거리를 준 것은 아닐까 싶어 씁쓸했습니다. 영화는 영화대로 역도산의 눈물이 고인 꿈과 그의 쓸쓸함을 그려도 됐을 법 한데 하는 아쉬움이 깊게 남습니다. 슬픈 역도산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제압하는 힘을 가져보겠다는 열망은 현실에서 우리를 비열하게 만들고 어리석게 만들 수도 있지,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오늘날 이라크 전선에서 고전하고 있는 미국을 봐도, 군사대국으로 가려는 일본을 보아도,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역도산, 힘으로 뚫어가는 길, 그 길이 당도하는 산, 그것이 한 영웅의 비극적 최후라면 그건 아마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닐 것입니다. 그의 꿈과 영웅적 의지는 그것대로 의미 있게 기억해주어야 하겠지만, 세상은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채워질 때 진정 새로워질 것입니다. 성탄절 다가오면서 더욱 그러한 생각, 깊어집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김민웅 박사가 강의하는 ☞ 투기자본경제교실 "투기자본에 저항하라"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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