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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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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75>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음양오행에 관한 정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필자가 음양오행을 연구해오면서 가지게 된 삶에 대한 나름의 통찰이랄까 또는 개인적 경험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자 한다.

어제 저녁이 동지(冬至)였으니 오늘의 해가 사실상 새해의 첫 태양이다. 동지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거쳐 돌아온 것이니 사계(四季)의 순환이 끝난 것이고 한 해의 죽음이다. 그리고 동지 다음 날은 새로운 한 해의 탄생이자 부활이다. 이는 신화(神話)적 해석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한 해가 죽고 새로운 한 해가 탄생하는 과정이다.

우리 인간들은 으레 수십 년을 살다보니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는 것이 그저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천문학적 과정으로 받아들일 뿐, 동지 다음 날 새 아침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기 시작하는 부활임을 자칫 잊고 살기 쉽다.

사람들은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 사람은 너무 오래 산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한 해로 삶을 마감하는 데 비해, 사람은 수십 년을 사니 그것은 수십 생(生)을 사는 것과 같다. 그러다 보니 올해가 지나가도 절로 내년으로 이어진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바람에 어쩌면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봄, 여름이면 여름, 그런 식으로 한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정취를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너무나 흔해빠진 우리 삶의 나날들, 오늘이 가면 절로 내일이 오고 내일이 가면 또 그 내일이 당연히 자동적으로 올 것이라 여기고 있기에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간과 나날들을 경제적 자유재(free goods)로 여기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무한정하던 자유재가 바닥났음을 알게 되는 날, 그것이 바로 죽음에 임박한 순간이 된다.

한 해의 삶이 소중하지 않은 자, 나아가서 하루의 해가 소중하지 않은 자에게 있어 죽음은 더 없는 소외의 순간이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본질에 있어 소외를 말한다.

내가 죽어도 봄이 되면 그 아름다운 꽃들은 피어날 것이고, 새들은 노래할 것이며, 선남선녀들은 화창한 봄빛을 받아 마냥 즐겁고 유쾌하게 떠들고 노닐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그곳에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바로 이것이다. 자신만 이 밝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삶을 충만하게 산 사람은 죽음을 커다란 연극 무대의 대미로 장식할 수 있으며 그 끝을 장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수십 년의 시간을 수십 번에 걸친 삶으로 거듭나면서 살았다는 것이니 이는 한 해를 일생으로 여기고 그 시간들을 소중히 받아들이며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어차피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영생(永生)에 대한 소망이나 기구(祈求)는 어쩌면 가장 허황된 바람일 것이다. 일년을 한 일생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맞이하는 시간들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긴 시간들일 수 있는 것을 헛되이 낭비하다가 나중에 가서 영생을 바라는 것은 그 얼마나 모순 가득한 삶의 자세인가.

음양오행이란 결국 네 계절의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네 계절의 순환이야말로 그것이 바로 한 세상이고, 동지에 가서 새 해가 뜨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한 찰나를 영원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영원을 찰나로 인식할 수도 있는 정신적 깊이를 지닌 존재이다. 한 평생 살고 나니 찰나의 일이더라는 선사(禪師)의 깨달음이나 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는 지옥 같더라는 우리 삶의 통찰은 공히 어김없는 진실인 것이다.

늙어서 회춘(回春)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바보다. 실은 해마다 봄이 오면 회춘인데 그 마음이 겨울의 잿빛이라 그런 것이다. 그런 이에게 회춘은 없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봄이 없다고 여기는 젊은이들 역시 세상을 모르는 바보다. 나이에 관계없이 봄이 되어 마음이 설레면 그것으로서 봄인 것을 그들만이 봄의 계절을 누리는 줄 알고 있으니 그 또한 어리석음이다.

금년 한 해 우리 국민들 기가 정말 많이 죽어있는 것 같다. 필자는 아직 길에서 한 번도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어보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몰리는 강남역 주변을 지나가도 캐롤 송은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은 장사하는 이들에게 대목이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으레 이맘때가 되면 거리에 캐롤 송이 넘쳐흐를 텐데 얼마나 장사가 안 되고 흥이 없으면 아예 그런 시도마저 포기했을까 생각하니 올해 우리 국민들의 기는 정말 폭삭 죽은 것 같다.

겨울의 한 복판, 죽음의 한 복판에서 필자는 다시 봄을 기다린다. 내년도 1/4 분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복사꽃과 오얏꽃, 그리고 벚꽃이 만발하는 봄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물론 그 봄은 그냥 몇 달의 시간이 흐르면 절로 오는 봄이 아니라, 다음 생에 맞이하는 봄일 수밖에 없으니 바로 내생(來生)의 봄이다.

봄이 와서 벚꽃이 피면 그 나무 가지 아래, 연분홍의 세상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새삼 고마워하며 즐겨보리라 마음먹어 본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올 한 해 동안 필자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오늘 글이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어 옮겨본다. 즐겨주시면 좋겠다. 쓰레기(현실)와 별(이상)의 중간 거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실존의 순간을 잘 묘사한 시라고 생각된다.

記憶祭 / 정현종

金인 時間의 비밀을 알고 난 뒤의
즐거움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처음과 끝은 항상 아무 것도 없고
그 사이에 흐르는
노래의 자연
울음의 자연을
헛됨을 버리지 말고
흘러감을 버리지 말고
기억하렴
쓰레기는 가장 낮은 데서 취해 있고
별들은 천공에서 취해 있으며
그대는 中間의 다리 위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음을

(알리는 말씀; 음양오행과 명리학 기초 클라스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시작 일자는 2005년 1월 8일 토요일부터이고, 매주 1회 4시간씩 진행됩니다. 기간은 3개월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필자의 메일이나 전화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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