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는 날>, <마부>, <로맨스 빠빠>, <로맨스 그레이> 등등을 비롯한 작품에서 한국 영화의 서민적 풍모를 창조해낸 인물로서는 단연 배우 김승호를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승호의, 쓸쓸한 듯 사람 좋은 너털웃음과 고독한 뒷모습은 우리 사회가 거쳐 온 고생스러웠던 시대의 긴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김승호”는 1950년대에 은막에 나타나서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꼽히는 1960년대 서민들의 심금을 울린 최고의 연기자로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이 나라가 식민지 치하의 혹독한 겨울을 감당하고 있던 1917년에 태어나서 아직도 가난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1968년, 무르익을 대로 익은 연기를 보일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었습니다.
오랜 연극판 생활에서 깊고 깊게 훈련된 연기를 바탕으로 남들보다 뒤늦게 영화계에 들어선 그는 한국전쟁의 상흔과 빈곤의 고뇌 속에서 헤매는 이 땅의 당대 아버지들의 모습을 처연하면서도 너그럽게 그려냅니다.
영화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대체로 이미 중년을 넘어 노년기 초입의 사나이로 보이지만, 사실 그 역할 거의 모두가 다 30대 후반에서 40대의 장년에 했던 것들입니다. 영상을 통한 우리의 기억과 현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대목이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그 당시 40대와 50대의 사회적 연령의 의미는 지금과는 사뭇 차이가 납니다. 오늘날의 4-50대는 그때와 비교해보자면 그야말로 청년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 합니다만, 그 시절이야 이미 적지 않은 나이로 취급받았고 조만간 머뭇거리면서 뒤안길로 퇴장해야하는 지점에 와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근대화의 격동기에, 어떻게 자신의 삶을 새로운 변화 앞에서 적응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그의 연기 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받고 좌절된 인생의 꿈을 다시 어떻게 주워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어리석은 궁리나 하든지 아니면 처지나 위신에 어울리지 않게 한 눈을 파는 식의 모습도 그는 더듬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내었습니다.
국내에서의 남우주연상은 물론이고, 아시아 영화제의 남우주연상도 네 차례나 수상할 정도였으니 <김승호>라는 인물의 영화적 표상은 한국이라는 국경선을 넘는 차원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려낸 중년의 사나이가 어쩌면 아더 밀러(Arthur Miller)의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의 주인공 “윌리”를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열심히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이루어 놓은 듯 했지만 정작 그 자신에게는 적지 않은 것들이 허망하게 남아 있는 듯한 외로움 때문에 말입니다.
항시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머금은 듯한 그의 따뜻한 미소, 그리고 억울한 일을 겪어도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듯한 그의 포용력 있는 삶은 힘든 시절에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감독들은 그의 연기와 그의 삶의 진실이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이 땅의 아버지들의 어깨가 자꾸만 처지고 있습니다. 중년의 가장들이,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사나이들이 허념무상하게 웃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지나간 줄 알았던 가난이 기습적으로 몰아치는 정경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대명천지에 굶어죽는 아이까지 생겼으니 말입니다. 이 땅의 지쳐있는 장년들이 곤혹스러워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이런 때에 우리를 위로해 줄 명배우 김승호도 없는 때에, 목마른 이 시대를 어떻게 위로받고 견뎌나가야 하는지 마음이 아픕니다.
낮은 자리를 향해 가는 정치가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요? 권력이 출세의 통로가 되고 있는 시대는 비극입니다. 고생스러워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김승호의 따뜻한 미소가 그립군요. (12월 1일, 김승호가 세상 뜬 날이더군요. 오래 전 그날 말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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