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 미국언론들 사이에서 관심사로 떠오른 것 중에 하나가 파월 국무장관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가운데 누가 먼저 사임할 것인가였다. 럼스펠드의 경우 이라크 전쟁포로 학대 사건과 지지부진한 이라크 상황을 이유로 문책성 인사가 단행되지 않겠냐는 추측이 나왔었다. 파월은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국무부를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일찌감치 떠돌았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모양새로 사임하느냐는 또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사임할 때 사임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먼저 등을 보이지는 않겠다는 얘기가 파월과 럼스펠드 양측에서 흘러나왔다. 파월은 아라파트 사망 이후 중동평화 문제 해결에 의욕을 보였고, 럼스펠드측도 최소한 1월말로 예정된 이라크 총선까지는 지켜봐야 하지 않겠냐는 입장이었다.
사실 파월과 럼스펠드는 부시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불협화음을 빚었었다. 예를 들어, 파월이 미국의 평화유지군 활동을 지지하면서 보스니아로부터의 미군철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을 때, 럼스펠드는 보스니아에서 활동중인 미군의 귀환을 고려중이라고 밝히면서 엇박자를 놓았다. 또 이라크 전쟁전 부시 대통령이 파월의 조언을 일부 받아들여 후세인에게 UN 결의안 수용을 촉구하면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자 바로 그 다음날 국방부측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은폐 노력을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승부는 럼스펠드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럼스펠드는 유임이 결정된 반면, 파월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잔류를 거절당했다. 이라크전쟁 직전 군 장성들을 포함한 파월의 측근들은 부시와 체니, 그리고 럼스펠드로 이어지는 이라크 전쟁 주창자들이 매서운 사냥꾼 매의 모습을 띠려고 애쓰고 있지만, 사실은 참전 경험도 없는 전쟁 아마츄어들, 다시말해 ‘가축이나 잡아먹는 매’(Chickenhawk)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비난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한때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4성장군 파월이 Chickenhawk들로부터 등을 떠밀린 격이 되고 만 것이다.
혹자들은 왜 파월이 진작에 사임하지 않았는지 의아해 하기도 한다. 부시행정부 출범 직후부터 최대 현안이었던 이라크 전쟁을 놓고 파월은 전쟁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인으로서 이른바 ‘파월 독트린’을 주장하면서 부시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다. 미국의 중대한 이익이 걸려 있는 분쟁에 한해 국민과 동맹국들의 지지를 확인한 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개입한다는 이 독트린을 적용할 때 이라크 전쟁은 처음부터 이유가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파월 독트린은 매파들에게 거부당했고, 특히 럼스펠드는 자신의 신개념 현대전 전략을 증명하기 위해 오히려 이라크에 동원된 미군병력을 계속 낮은 수준으로 유지해왔다. 이런 수모와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국무장관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는 게 파월 지지자들의 주장이었고, 매파들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파월에게 사임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충실한 공화당원인 파월은 자신의 사임으로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에 정치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을 원치 않았고, 부시 역시 재선을 위해서는 자신보다도 더 인기가 좋은 파월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1기 부시 행정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발표된 파월의 사임은 서로 상처없이 헤어지는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떠나겠다는 파월을 바라보는 미국언론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그동안 파월에게 연민의 정을 보였던 언론과 논평가들의 평가는 더 혹독했다. 한마디로 도대체 파월이 국무장관으로서 남긴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나름대로 현실주의적인 시각을 제시하면서 부시의 외교정책이 극단으로 치닺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정책수행 과정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늙은 군인의 모습,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는 혹평이다. 특히 나중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UN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했던 것은 파월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됐다. 또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을 때는 과감히 자리에서 물러날 줄 아는 용기와 결단도 없었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러나 2기 부시행정부에 잔류하게 된 매파들 역시 마냥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럼스펠드의 유임은 그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신임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라크 정책에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도 된다. 부시의 재선으로 이라크 전쟁은 온전히 부시의 전쟁이 되버렸다. 그리고 그 공과 역시 고스란히 부시의 몫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당장 내년 1월말로 예정된 이라크 총선부터 제대로 실시될지는 의문이다. 또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부시의 계획도 현재로서는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해 보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