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경 오늘날의 영국 땅 브리튼에서 맹장(猛將) 한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는 브리튼에 정착했던 켈트족의 수호자로서 당시 이곳에 침입해온 색슨족과의 대결전을 벌이면서 전설적 영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후 중세 유럽 전체에 걸쳐 최고의 인기를 모으는 “고전적이고도 낭만적인 전사(戰士)의 무용담”이 됩니다. 이쯤하면 <아써(King Arthur) 왕> 이야기인 것을 누구나 눈치 채실 것입니다.
아써는 애초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보검 엑스칼리버(Excalibur)를 손에 넣는 과정에서 왕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스스로 확인하게 됩니다. 바위에 굳게 꽂힌 칼을 뽑아내는 사람이 그 보검의 주인이자 나라의 대운을 움켜쥐게 된다는 신화적 예언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칼은 제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뽑아낼 수 없었고, 그 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신탁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자에게만 주어진 하늘의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무명의 한 젊은이가 시대정신의 정점에 서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엑스칼리버는 그래서 단지 칼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주도권을 의미했고 이는 시대적 도전을 두 어깨에 걸머지고 나가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신의 가호를 동시에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면서 로마원정에까지 오르는 등 기사도적 무용을 떨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저 유명한 <원탁의 기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로마 원정기에는 후사를 맡겼던 조카의 배신으로 왕권과 왕비까지 앗기는 비운에 처하게 되었고, 이후 귀향하여 자신의 권좌를 재탈환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치명상을 입은 채 신비의 성채 “아발론”으로 떠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아써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러나 아써 왕은 그리스도의 성배를 찾는 유랑의 영광스러운 고독과, 엑스칼리버로 빛나는 용사의 카리스마, 원탁의 기사로 이루어낸 평등한 동지애, 그리고 목숨을 건 사랑이라는 테마를 남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배를 찾는 과정은 달리 말하자면 목마른 시대의 영혼을 축이는 능력에 대한 깊은 열정과 추구를 의미합니다. 엑스칼리버는 하늘이 내린 비범한 지도력을 뜻하고 원탁의 기사는 그 지도력이 만들어내는 정치공동체의 동지적 결속력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을 건 그의 사랑은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기사도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써 왕 이야기는 위기의 시대에 켈트 민중들이 열망했던 지도자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배가 상징해주고 있듯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당대의 야위어가는 영혼을 되살려갈 수 있는 정신적 가치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단히 바위에 꽂힌 칼을 뽑아 역사의 매듭을 풀어내는 지혜로운 용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의 심장에는 언제나 약자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넘쳐나서 그 어떤 위태롭고 어려운 상황도 힘 있게 돌파하여 상대를 구하는 의지가 식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그를 지켜주는 것은 그와 함께 하늘의 사명을 나누어지고 있는 <원탁의 기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때에는 유랑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브리튼 민중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숨을 쉬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의 때가 몰아치면 어디에 있든 달려와 모두 원탁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 국가적 난관을 뚫어나갔던 것입니다.
민심의 절망적 한탄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정치권이 원탁회의는 열고 있지만 전설적 원탁의 기사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칼은 꽤나 휘두르고 있지만 그것은 애석하게도 엑스칼리버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기진한 영혼을 일으켜 세울 성배 대신 다른 것을 찾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온화한 사랑은 없고 각을 세운 대립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유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 시대가 이렇게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까닭을 더 깊이 깨우쳐야 하는 것인지요. 아써 왕의 이야기가 브리튼의 전설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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