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는 과연 비극적 이름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총격장면에서 비둘기를 날리는 비극미를 인상 깊게 남긴 영화 “로미오는 죽어야 한다(Romeo must die)”라든가, 또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알 포인트(R-point)”의 “알(R)”이 의미하는 “로미오” 역시 모두 죽음의 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마도 섹스피어의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등장하는 로미오의 운명이 사랑을 향한 질주 끝에 그 마지막 장애를 넘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마 보신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영화 "알 포인트(R-point)"는 프랑스가 지배했던 시절 베트남의 한 섬에서 일어났던 프랑스 군의 실종사건, 그리고 이후 미군과 한국군으로 이어지는 이 실종의 자취를 무대로 하여 펼쳐집니다. 1972년, 베트남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미군도 대부분 철수하고 한국군만 뒤에 남아서 전쟁의 뒤치닥거리를 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 알 포인트에서 사라진 부대원들이 계속해서 구조 무선을 치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 최인태 중위를 대장으로 한 소대원들이 바로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알 포인트>는, 결국 눈을 다쳐 보이지 않는 부상자를 유일한 생존자로 남겨 놓고 이들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불귀(不歸)의 현장>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공포와 전쟁을 두 축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에서 피 말리는 생존의 고독을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30여년 전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겪었을는지 그 단면과 만나게 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대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 등장하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고, 알 수 없는 죽음의 사신이 자신들을 향해 육박해오고 있다는 것을 무섭게 느끼게 됩니다.
나이가 기껏해야 스무 살이 갓 넘었을까, 많아야 서른 근방의 청년들이 이국땅의 밀림 한 복판에서 경험했을 이와 다르지 않을 두려움이 얼마나 깊고 강했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합니다. 전쟁이란 적이 있다 해도 그 적이 어디에서 어떻게 자신을 위협하고 공격해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미지의 늪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영화 알 포인트에서 한국군 소대원들이 겪었을 전쟁의 공포만이 아닌 또 하나의 진실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알 포인트라는 현장에서 무수히 희생당했던 베트남 민중들의 고난과 슬픔, 그리고 절규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베트남 소녀의 처연한 눈빛과 그 혼령의 움직임은 그 땅이 치러냈던 비극의 계곡을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감우성이 연기한 소대장 최인태 중위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부대원들을 지켜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생각이 깊은 지휘관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과 자신의 부대원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가담하게 된 베트남의 비극에 더 이상 총구를 겨냥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알 포인트라는 지점에서 거듭 거듭 발생해온 침략과 방어, 그리고 그 와중에서 이어진 모두의 희생에 대한 단절의 의지를 기원하는 몸짓이기도 했습니다.
쿠바 관타나모의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고문과 잔혹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국제 적십자사가 공식적으로 문제 삼고 나왔습니다.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악몽이 언제인데 아직도 이러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이라크 정정은 지금 국제사회가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팔루자를 비롯해서 어느새 이라크는 혹 알 포인트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줄리엣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우리의 로미오들이 30년 전의 베트남에 이어, 지금은 이라크 전선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불귀의 로미오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알 포인트의 비극이 됩니다. 부디, 이들 로미오가 더 이상의 그 어떤 국제정치의 논리에도 휘둘리지 않고 돌아와 줄리엣과 사랑을 나누는 그런 세월, 기원합니다.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 반대를 위해 국회 앞에 시위천막이 다시 세워졌다고 하는 군요.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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