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 한 송이를 남기고 시인 김춘수는 오늘 <천상의 화원(花園)>으로 돌아갔습니다. 1922년생이시니까 여든 두해의 삶을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제 홀연히 바람에 흩날리는 꽃씨처럼 우리 앞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의 시 <꽃>이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에 첫 자리를 늘 차지했다는 전언이 있고 보면, 아마도 그 시는 시인들에게도 시적 감수성을 깊이 일깨우는 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첫 줄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던 것처럼 몸짓으로 그치고 만 그 무형의 존재가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도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으니, 생명의 힘을 가진 시어(詩語)를 찾으려는 시인들 모두의 열망이 여기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다만 그 이름을 그저 발음한다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진실과 만나는 문을 여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 겪고 있는 아픔을 알고 어루만지는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꿈과 기쁨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여, 그 이름을 불린 대상은 그 이름을 부른 이가 세상이 그저 스쳐지나갔거나 또는 외면했다든지 아니면 무시 내지는 경멸감조차 보인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 준 것에 감격해합니다. 그 감격은 곧 “꽃”이 됩니다. 이제껏 아무에게도 함부로 보이지 않았던 그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그 이름을 부른 이에게만 특별하게 내보이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창조입니다. 내면의 진실을 깊이 주목하고 성찰하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시인 김춘수는 그 이름을 부른 이 또한 그 누군가에게도 역시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우리 각자는 그 상대가 가진 빛깔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향기를 느낄 후각 또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는 세상은 그 자체로 이미 화려한 꽃밭일 것입니다. 누가 씨를 뿌리거나 또는 물을 주거나 아니면 비료를 주어야만 되는 그런 꽃밭이 아니라 서로에게 꽃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서로를 꽃으로 불러내는 힘이 없을 때, 아이들은 졸지에 범죄자가 되어 시험부정을 위해 몰두하게 됩니다. 여성들은 미모지상주의에 빠져 자신의 얼굴과 몸을 스스로 시들게 합니다. 지구의 생명을 짓밟고 그 위에 자신의 성채를 쌓아,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생명의 자리를 자기가 파괴하는 모순에 처합니다. 정치는 격돌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하고 사회는 적의로 가득 찬 곳이 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 “꽃”은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너는 나에게/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되고 싶다” 여기서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기억되는 존재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누어진 진실이 나의 오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상>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짓은 애초의 몸짓에서 더 깊이 들어간, 서로의 눈 깊숙한 곳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일상이 되는 꿈을 가진 사회는 사뭇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 모두 더욱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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