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알라바마주 버밍햄에는 17미터가 넘는 세계 최고 최대 규모의 철제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1904년, 미주리 주에서 열렸던 세계 박람회에 버밍햄 시가 참여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광물과 제련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상징물이었습니다. 이태리 출신의 조각가 지쉡프 모레티(Guiseppe Moretti)가 만든 이 작품은 지난 1999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작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동상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불칸>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파이스투스”라고 불리기도 한 존재의 로마적 변형이었습니다. 불칸은 영어로 “벌컨(Vulcan)”이라고 발음하는데, 화산을 의미하는 “벌케이노(vulcano)”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칸은 불의 신이자 올림푸스 신들의 대장장이 역할을 한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고대 로마인들에게 벌케이노, 즉 화산은 불칸이 일하는 작업장의 굴뚝으로 생각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철강산업을 주도하고 싶었던 버밍햄이 바로 이 불칸을 자신들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등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칸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불명확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약골과 불구, 그리고 못생긴 얼굴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버림받게 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워낙이도 탁월하고 정교한 기술과 능력 때문에 올림푸스 신들의 반열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신화에서 불칸은 태양의 신이 아침저녁으로 동과 서를 왔다 갔다 하면서 타고 다니는 불마차를 만들거나, 용사 아킬레스의 갑옷과 무기를 제작하기도 하였던 것으로 전해져옵니다. 인류문명의 흐름 속에서 보자면, 불칸은 철기문명을 주도했던 존재의 신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말의 경우, 만주벌판의 역사에 뿌리를 둔 “다루하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철기시대 부족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로써, 쇠를 다룰 줄 아는 자, 즉 철기문명의 주도자로서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루다”와 큰 사람에게 붙이는 “하”, 그리고 강한 존재를 뜻하는 “치”가 하나로 이어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마루”에서처럼 “높다” 또는 “으뜸”이라는 의미를 가진 “마루”와 강한 자 “치”가 붙어 “마루치”가 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다루하치”는 동북아시아의 <불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치”는 이후 낮은 말이 되어 “이 치, 저 치” 또는 “장사치” 등으로 격하가 되어지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 “다루하치”에 있는 그 “다루다”가 이후 “다스리다”로도 발전하여 정치 지도자의 힘과 권위를 뜻하는 것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미국 네오콘이 부시 집권 1기에 관철시키지 못했던 한반도 문제의 군사적 해결과 북한 체제 붕괴전략을 다시 들고 나오는 모양입니다. “비외교적 선택”이라는 단어와, “북한 정권교체”라는 목표를 결합시키고 우리 사회 내부의 정치세력 재편까지도 꾀하는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네오콘은 자신들을 버밍햄에 세워진 철과 불의 신 <불칸>을 따 복수형 별칭으로 “불칸들”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의 신”이라는 상징도 아울러 가지고 있는 불칸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의 다루하치”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철강산업보다는 군수산업의 수호자처럼 되어버린, “로마신화의 아메리카적 변형”이라고 할 만 합니다. LA타임스의 기자 제임스 만은 이들 네오콘의 등장과 관련하여 <불칸들의 등장(Rise of the Vulcans)>라는 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신화에서 불칸은 제우스가 최초의 여자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기도 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모든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판도라>입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순간, 세상은 악의 영령들이 날뛰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것은 “희망”이었지요. 그 희망은 다행스럽게도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으로 나와 마침내 악 그리고 좌절과 대결하는 힘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상을 진정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불마차를 앞세운 불칸의 세력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희망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은 지금 희한하게도 제국 로마의 신화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부는 때에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촛불, 우리의 영혼과 의지에 잘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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